천재가 초심 찾으면 세계 기록 바뀐다…'수영 여왕' 티트머스의 대관식

배영은 2023. 7. 2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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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티트머스(23·호주)는 2019년 광주 세계수영선수권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19세였던 풋내기 선수가 '수영 여제' 케이티 러데키(26·미국)의 자유형 400m 4연패를 저지했다. 러데키와 수영계가 모두 충격에 빠져 있을 때, 티트머스는 "나 자신이 잘할 거라고 믿었다. 놀랍지 않은 결과"라고 당차게 말했다.

그 후 4년이 흐른 지난 23일, 티트머스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다시 한 번 세계선수권 여자 자유형 400m 정상에 섰다. 그냥 우승만 한 게 아니다. 3분55초38의 기록으로 터치패드를 찍어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신성' 서머 매킨토시(17·캐나다)가 지난 3월 작성한 종전 기록(3분56초08)을 4개월 만에 0.7초 단축했다. 2위로 들어온 러데키(3분35초83)보다 3초35나 빨랐다.

티트머스가 23일 후쿠오카 세계수영선수권 여자 자유형 400m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한 뒤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여자 자유형 400m는 후쿠오카 세계선수권 개막 전부터 대회 최고의 빅 매치로 꼽혔다. 세계선수권 금메달 19개를 보유한 러데키, 올림픽 디펜딩 챔피언인 티트머스, 세계 기록 보유자인 매킨토시의 '천재 삼각 대결'이 시선을 끌어모았다.

승자를 점치기도 어려웠다. 올해 400m 세계 랭킹 1~3위는 매킨토시(3분56초08)-티트머스(3분58초47)-러데키(3분58초84) 순이었지만, 큰 경기 경험과 관록은 그 역순이었다. 이들이 나란히 3~5번 레인 출발대에 서자 경기장 안팎에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티트머스는 그 팽팽하던 흐름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첫 50m 지점을 2위로 통과한 뒤 100m 지점부터 선두로 치고 나가 마지막까지 1위를 유지했다. 350m 지점에서 마지막 턴을 할 때는 2위 러데키에 2초 넘게 앞섰을 정도다. 티트머스가 마지막 50m를 압도적인 스피드로 독주하자 관중의 엄청난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그는 레이스를 마치고 새로운 최고 기록을 확인한 뒤 비로소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검승부 끝에 최종 승자가 된 '여왕의 미소'였다.

티트머스(오른쪽)가 23일 후쿠오카 세계수영선수권 여자 자유형 400m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한 뒤 2위 러데키의 축하를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티트머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물과 친했다. 호주 최남단의 섬 태즈메이니아에서 실컷 수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4세였던 2015년 가족과 함께 정든 고향을 떠나 브리즈번으로 이사했다. 크리켓 선수였던 아버지와 육상 선수였던 어머니가 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부부는 슬슬 딸에게 좋은 코치와 훈련 시설이 필요한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티트머스는 브리즈번으로 이주한 뒤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체계적인 훈련을 소화하고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호주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남다른 체력과 폭발적인 스퍼트 능력 덕에 '터미네이터'라는 애칭도 얻었다.

첫 세계선수권 출전이던 2017년 헝가리 대회에서 계영 800m 동메달을 따냈고, 2019년 광주 대회에선 자유형 400m 세계 챔피언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2년 뒤 도쿄 올림픽 자유형 400m에서도 다시 러데키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해 5월 호주선수권에서는 러데키가 6년간 보유하던 세계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더는 이룰 목표가 없어 보이는, 완벽한 상승 곡선이었다.

재능만으로 이뤄낸 결과는 아니다. 티트머스에게는 모든 대회가 '전쟁'이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강훈련은 물론이고, '셀리악(celiac) 병'이라는 알레르기 질환과도 싸워야 했다. 몸 안에 글루텐이 소량이라도 들어가면 소장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나는 병이다.

식당 음식을 무심코 먹었다가 경기를 망친 적도 있고, 2주 만에 체중이 5㎏나 줄어든 적도 있다. 늘 전담 영양사와 동행하면서 엄격한 '글루텐 프리' 식단을 유지해야 정상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설 수 있다. 그가 지난달 자국 대회를 앞두고 "지금은 내년 파리 올림픽만 바라보고 있다. 그 후 계획은 머릿속에 없다. '올림픽 사이클'을 한 번 더 거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버겁다"고 토로했던 이유다.

23일 후쿠오카 세계수영선수권 여자 자유형 400m 금메달리스트 티트머스(가운데), 은메달리스트 러데키(왼쪽), 동메달리스트 페더웨어. AFP=연합뉴스


지쳐가던 티트머스는 뜻밖의 자극을 받고 심기일전했다. 자신이 어렵게 만든 세계 기록을 17세 샛별 매킨토시가 1년도 안 돼 갈아 치웠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다. 4년 전 혜성처럼 나타나 러데키를 제쳤던, 호주 섬마을 출신 19세 소녀가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티트머스는 "세계 기록을 세울 때 많은 선수가 이 기록은 영원할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게 깨진 뒤에야 '아, 수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라고 깨닫는다"며 "(매킨토시의 기록은) 내게 좋은 동기부여가 됐다"고 했다.

티트머스는 그렇게 다시 전진을 시작했고, 결국 후쿠오카에서 세계 기록의 주인 자리를 되찾아왔다. 매킨토시는 바로 옆 레인에서 4위(3분59초94)로 들어와 티트머스의 대관식을 지켜봤다. 티트머스는 금메달을 목에 건 뒤 "난 그저 예전의 그 어린 소녀처럼, 두려움 없는 레이스를 펼치겠다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 그 결과가 이것(세계신기록)"이라고 했다.

후쿠오카=배영은 기자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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