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이 해안침투 눈돌린 계기…목책 휴전선은 언제 철책이 됐나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이철재 2023. 7. 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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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휴전선에 방책 ’

휴전선에 철책선을 설치한다는 국방부 발표를 기사화한 중앙일보 1967년 9월 15일자 1면 지면.


중앙일보 1967년 9월 15일 1면 기사 제목이다. 기사는 “14일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전 휴전선에 목책 대신 전기 철조망과 대인 레이더로 된 방책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고 썼다.

철책선은 휴전선의 상징과 같다. 그러나 철책선이 한반도의 허리를 가른 것은 1967년 이후 일이다.

2012년 육군 장병들이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전호리 한강변에서 42년만에 한강 하구 군부대 철책선을 철거하고 있다. 중앙포토


53년 7월 27일 정전 당시 휴전선은 참호지대였다. 직전까지 전투가 치러졌기 때문에 참호가 쭉 이어졌고, 흙 주머니와 나무로 구축한 방어진지가 군데군데 있었다. 봉우리에 망루 모양의 감시초소가 세워졌다.

하지만, 북한이 60년대 특작부대(특수부대) 침투조(무장공비)를 보내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비정규전을 걸고 철도와 시설을 폭파하기 시작했다.

육군 제21보병사단이 1966년 휴전선 남방한계선에 목책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국방홍보원


고랑포 일대의 목책선. John Hayman


휴전선 일대를 중심으로 북한의 무력 도발이 잦아지면서 64년 한신 장군이 지휘하는 6군단 지역에서 목책이 처음 등장했다. 아름드리나무를 베어 무장공비의 침투를 막으려고 초소와 초소 사이에 X자 모양으로 세웠다. 그러나 목책은 시야를 가리고, 나무가 금방 썩어 자주 갈아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북한은 66년 무장공비의 저강도 전쟁을 강화했다. 66~69년 한국군 299명이 숨지고 559명이 다쳤다. 주한미군 등 미군은 사망 75명, 부상 111명이었다. 북한군 역시 397명이 죽었고 12명이 생포됐다. 33명은 귀순했다. 또 무장공비 2462명이 체포됐다.

1967년 처음으로 설치된 철책선의 모습. 국방홍보원


배경엔 북한의 김일성이 있었다. 김일성은 66년 10월 5일 제2차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는 남조선(한국)에서의 혁명 력량(역량)의 강화 여하에 크게 달려 있다. 남조선에서는 여러 가지 투쟁 형태와 방법을 옳게 배합하여 혁명운동을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찬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장은 ”북한은 무장공비를 보내 한국 후방을 교란한 뒤 70년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전략이었다“며 ”당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확전을 자제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도발 수위를 계속 높였다“고 설명했다.

1968년 1ㆍ21 사태때 생포된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중앙포토


1968년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군 당국이 노획한 무기들. 중앙포토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1ㆍ21 사태와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한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모두 북한의 대남 도발이 최고조였던 68년에 일어났다.

북한은 미국에도 덤볐다. 북한은 68년 1월 23일 동해에서 미국 해군의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함을 강제로 나포했다. 이 과정에서 1명의 승조원이 숨졌다. 69년 4월 15일엔 북한의 미그-21 전투기가 미국 해군의 전자정찰기인 EC-121을 격추했다. 당시 미 해군 30명과 미 해병대 1명이 사망했다.

1968년 북한이 납치한 미국의 푸에블로호 함장과 승조원들이 배에서 끌려 내려오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베트남 전쟁과 미 합참: 1960~1968’이란 문서에서 66~69년을 ‘제2의 한국전쟁(The Second Korea War)’이라고 규정했다. 정전협정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전쟁에 가까운 교전행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미 육군은 휴전선 일대의 무력분쟁에 참가한 장병에게 전투보병휘장(CIB)을 달도록 했다. 이 휘장은 실제 전투를 치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기자회견 중인 찰스 H. 본스틸 3세 유엔군사령. 수정체 제거 수술을 받아 왼쪽 눈에 안대를 하고 다녔다. 중앙포토


휴전선 일대를 중심으로 북한의 무력 도발이 잦아지면서 한·미는 남방한계선을 따라 철책선을 세웠다. 당시 유엔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인 찰스 H. 본스틸 3세 대장이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45년 딘 러스크와 함께 한반도에 38선을 그은 장본인이었다.

쇠기둥을 박고 그사이에 철망을 쳤다. 무장공비가 타고 넘어갈 수 없도록 꼭대기는 Y자 모양으로 벌려 놓고 철조망으로 둘렀다. 철책선 설치는 험한 산세 때문에 난공사 중 난공사였다. 일부 구간은 70년대에서야 완공할 수 있었다.

미 육군이 실제 전투를 치른 장병에게 주는 전투보병휘장(CIB). 휴전선 일대의 무력분쟁에 참가한 장병에게도 이 휘장을 달게 했다. 미 육군


야간 경계를 위해 전등을 달았다. 철책선을 따라 전술 도로를 깔았고, 산악 구간에는 시멘트 계단을 만들었다. 파티오 계단으로 바뀐 곳도 있다.

철책선과 촘촘한 경계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지상침투가 힘들어지자 북한은 70년대 해안침투로 눈을 돌렸다. 그렇다고 북한이 지상침투를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92년 5월 22일 제3보병사단은 강원도 철원 은하계곡으로 몰래 들어온 북한 무장공비 3명을 사살했다. 이때 중대장이었던 김승겸 대위가 큰 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현재 합동참모의장(육군 대장)이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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