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도전 12년… “이젠 진짜 모래판 장사 될래요”
예로부터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씨름. 원시사회로 거슬러가야 겨우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오랜 전통의 민속 스포츠지만 모래판 위에 여자가 선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1999년 최초의 여자 씨름선수가 등장한 이래, 여자씨름은 올해 초에야 전국체육대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짧은 역사 때문인지 판이 커질 기회도 적었다. 남자 씨름판엔 초등학교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선수들이 많지만 여자씨름은 아직 지인들을 통해 알음알음 입문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현재 씨름을 전업으로 삼는 여자 선수들이 뛸 수 있는 곳은 실업팀 6군데가 전부다. 프로팀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씨름 선수가 가장 명예롭게 여긴다는 장사 타이틀에 걸린 우승 상금도 남녀 평균 6배가량 차이가 난다. 스타 선수들이 애초에 탄생하기 어려운 척박한 환경이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도가 덜한 매화급(60㎏ 이하 체급)에서 스타가 나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 좁은 판을 비집고 꿋꿋이 샅바를 매온 선수들도 물론 있다. 지난 6일 대통령기 씨름대회에서 1위에 오른 김은별(28·안산시청)이 이들 중 하나다. 모래판을 밟은 지는 어언 12년이 다 돼가지만 얼굴을 알린 건 최근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종목을 대표해 나온 만큼 씨름 선수 이름에 먹칠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는 김은별은 아이돌을 방불케하는 인기를 얻으며 불모지에 있던 여자씨름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단체 직관’에 ‘커피차 조공’까지 불사하는 팬들의 사랑 덕인지 올해 그는 기세 좋게 두 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매해 더 강해지고 있는 김은별을 지난 12일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안산시청 씨름부 훈련장에서 만났다.
김은별은 중학생 때인 2011년 동네 씨름부 감독의 권유로 우연찮게 모래판에 발을 들였다.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를 해 공인 4단까지 땄다는 그는 운동신경은 좋았지만 당시만 해도 체격이 운동 선수의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어딜 가든 ‘노루’ ‘사슴’ ‘종이인형’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이 몸으로 무슨 씨름을 하냐”, “여자가 무슨 씨름이냐”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입문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내거나 눈부신 극복 신화를 써내려가는 신예의 스토리도 김은별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씨름을 시작한 김은별은 대학 때까지도 시합이 열리면 학교를 빠지고 씨름판으로 향했지만 재미와 성적은 별개라는 듯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이 시기 거둔 입상 경력은 한두 건에 불과하다.
대학 졸업 후엔 최초의 여자 씨름 실업팀 ‘콜핑’의 부름을 받고 본격적인 전업 선수 생활에 나선다. 그러나 데뷔 때만 해도 씨름 자체에 대한 열정은 그리 크지 않았다. 김은별은 “성적을 내고 싶다는 의지도 끈기도 없었던 시절”이라고 돌아본 뒤 “지금과는 너무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욕심이 생긴 건 2020년 현 소속팀 안산시청 씨름부에 오면서부터다. 콜핑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동안엔 성적이 통 오르지 않았다. 고민 끝에 샅바를 내려놓은 김은별에게 손을 내밀어 준 건 현재 팀에서 지도를 맡고 있는 김기백 코치였다. 콜핑 시절부터 그를 눈여겨봤던 김 코치의 설득에 김은별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다시 씨름판 위에 오른다.
“안산시청을 만나면서 다시 태어난 거죠. 제대로 된 승리도 없이 운동을 그만뒀는데 이 팀에 와서 처음으로 1대 1 지도를 받아봤어요. 내 특징에 맞는 지도를 받고 나만의 기술을 연마해본 게 처음이었어요. 이번에는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은별의 선수생활은 ‘버티기’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팀에 와 새로운 마음 가짐을 갖게 된 만큼 곧바로 성적이 나면 좋으련만, 그에게 결승 문턱은 너무나도 높았다. 일단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운동을 다시 시작한 첫해부터 코로나19로 시합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공백의 시간이 또 찾아왔다. 김은별은 이 기간을 오롯이 연습으로 버텼다.
안산시청 여자씨름부는 훈련량이 많기로 유명하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웨이트-기술훈련-연습경기로 이어지는 루틴을 한바탕 뛰고 나면 한나절이 간다. 주말에도 틈틈이 기본 훈련과 러닝을 병행해 말 그대로 쉴 틈이 없다. 김은별은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가장 달라진 점으로 콤플렉스였던 체격과 체력을 꼽았다.
“여기 처음 왔을 때는 턱걸이는커녕 매달리기도 못했어요. 달리기만 하면 꼴찌였고요. 저 혼자 멀리 뒤처져있어서 코치님이 걱정돼 다시 돌아오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저희 팀에서 저보다 빠르게, 오래 뛰는 사람도 없어요. 웨이트도 20㎏을 겨우 들었는데 지금은 중량급 애들보다도 제가 더 많이 무게를 들어요.”
몸을 키우고 체력을 길렀음에도 성적이 따라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긴장을 많이 해 연습한 걸 꺼내보지도 못했다. 실전에 들어가기 직전까진 누구보다 앞서있던 김은별이 씨름판에선 꼼짝 못하고 쓰러지자 주변 사람들이 더 아쉬워했다. 지고 내려올 때마다 “너 정말 잘 하고 있어”, “1년만 더 하면 진짜 장사 되겠다”는 식의 위로가 쌓였다. 이 즈음엔 ‘무관의 제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반짝 성적이 날 때도 있었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21년 전국시도대항장사 씨름대회에서 마침내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생애 첫 우승을 맛본 뒤엔 더 긴 터널이 김은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욕심이 과했는지 1년 반 동안은 시합에 나가서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말 그대로 ‘죽 쒔다’고 그래야 되나. 연습 성적은 또 되게 잘 나오거든요. 그런데 시합만 나가면 아무것도 못하고 계속 자빠져요. 기술을 걸든 뭐라도 해보고 지면 보완을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었어요.”
슬럼프의 정점은 지난해 단오대회에서 찍었다. 실업팀에 갓 올라온 대학생을 상대로 만났을 때였다. 쉽게 이길 거란 예상과 달리 김은별은 공격을 걸지 못하고 도망만 다니다 가까스로 3판2선승을 따냈다. “지금껏 치른 경기 중 제일 오래 걸렸다”고 돌아본 그는 “시합을 끝내고 충격도 받았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당시엔 별다른 돌파구도 없었다. 김은별은 시합 후 주어지는 일주일간의 휴식기간도 반납한 채 쉬지 않고 훈련에 임했다. 좌절감을 온전히 느끼느니 운동으로 푸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는 “‘열심히’의 기준 자체를 바꿨다”고 말했다.
“‘살면서 오늘만큼 열심히 한 적이 없다’는 확신을 매일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했어요. 연습 경기 상대로 맨날 무리 중 제일 조그만 초등학생을 골라 잡다가 점차 고학년, 그 다음엔 중학생 순으로 기준을 높여갔죠. 그만큼 내 실력도 올라가는 게 느껴졌어요.”
지독한 노력이 통한걸까. 터널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부터 감을 찾은 김은별은 올해 벌써 2관왕을 달성했다. 지난 3월 학산김성률장사배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최근 대통령기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주무기 밭다리로 이 체급 최강자들을 여러 차례 꺾었다.
여자 씨름에 장사 타이틀이 주어지는 대회는 구례전국여자천하장사대회와 민속씨름, 민속씨름리그 대회다. 김은별이 이제껏 우승을 차지한 대회는 모두 전문체육·생활체육으로 구분되는 일반대회로 아직 매화장사 타이틀을 손에 넣지 못했다. 예년보다 좋은 페이스에도 목표에 대한 갈망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다.
5년 전 김은별에게 씨름은 ‘도전’이었다. 감히 정상을 넘보지 못했던 시절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증명’이다. ‘매화장사’란 꿈은 이제 개인적인 목표를 넘어 팬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
“진짜 매화장사가 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이 보여요. 목표와 우승에 대한 갈망이 매해 더 강력해지거든요. 많아진 인기에 하나하나 다 보답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열심히 해서 보여주는 것밖에 없어요. 지금은 내뱉은 목표만큼은 지키자는 생각이에요.”
김은별은 다시 샅바를 고쳐 맨다. 25일부터 충북 제천에서 열리는 2023 민속씨름 제천장사씨름대회에서 목표 매화장사를 향해 달려나간다.
안산=이누리 기자 nur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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