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시시각각] 하늘의 강, 땅의 강
온 천하가 질척이는 요즘이다. 검푸른 수조에서 빠져나왔나 싶더니 바로 벌건 화로 속이다. 그리고 또 폭우다. 비와 더위가 순간순간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앞날이라고 순탄한 건 아니다. 2020~2039년 동아시아 평균기온이 1~1.5도 올라갈 전망이다. 한반도 장마 강수량도 최대 5%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기상청 『장마백서 2022』의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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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한호우 부른 하늘의 수증기띠
날씨도, 사회도 극단으로 치달아
상처 난 민심에 소금을 뿌려서야
」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심각하다. 여름철 강수량이 각각 5~15%(2040~2059), 10~20%(2060~2079)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대륙과 해양의 온도 차가 커지면서 한반도를 덮는 수증기 양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지구를 괴롭힌 인간(화석문명) 카르텔의 업보쯤 된다. 기상전문가들이 경고하듯 지구온난화를 늦추는 고삐를 더 세게 죌 때다.
요즘 장맛비는 ‘극한호우’다. 집중폭우도 부족한 듯 올해 ‘극한’이 공식 용어로 채택됐다. 시간당 50㎜, 3시간 누적 90㎜ 이상 비를 가리키는데, ‘갈 데까지 갔다’는 극한의 뉘앙스가 섬뜩하다. 자본과 이념이 대립했던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명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 앞의 21세기는 자연과 인간이 충돌하는 ‘극한의 시대’로 끝날 수 있다.
극한호우의 세상, ‘하늘의 강’이 주목 받고 있다. 지구 상공을 떠돌고 있는 수증기 더미를 뜻한다. 적도 근처 열대 해양에서 발생해 북쪽 대륙으로 흐르는 수증기가 좁고 긴 띠 모양을 이뤄 ‘하늘의 강’ ‘대기의 강(大氣川, Atmospheric River)’으로 불린다. 평균 길이 1600㎞에 최대 폭 400㎞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주로 북미 지역 홍수의 원인으로 꼽혔는데, 최근에는 한반도 여름철 호우와 관련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올해 발표된 논문 ‘대기의 강이 남한의 강수 특성에 미치는 영향’(문혜진·김진원 등)에 따르면 지난 37년간 폭우 가운데 50% 이상이 ‘하늘의 강’ 영향을 받았다. 7월의 경우 그 비중이 72%까지 치솟았다. 비슷한 주제의 지난해 논문(권예은·박찬일 등)에서도 한반도 전체 강우량 중 대기천 강수의 비율이 51%(여름철 58%)를 기록했다.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팀장은 “온난화가 급박해질수록 돌발적인 피해가 더 자주,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며 “극한호우 다음에 올 용어가 뭘지 걱정된다, 초극한쯤 될까”라고 했다.
하늘의 강이 범람하면 땅의 강도 넘친다.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에 즉각 영향을 미친다. 땅의 피해를 줄이고 하늘의 습격을 막는 새 매뉴얼이 절실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쓰는 말처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서둘러야 한다. 올 3월 유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동안의 행동이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달궈진 땅과 바다에 더위를 먹은 까닭일까. 정부도, 지자체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다. 수재 현장에 빨리 갔다고 상황이 크게 바뀔 게 없었을 것이라는 대통령실이나 충북지사의 문제성 발언이 대표적이다. 물론 국민은 잘 안다.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행정 최고책임자라면 참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 재발 방지를 앞세워야 했다. 그게 리더십의 출발점이다.
더욱이 대통령이 재난 앞에서 전 정권의 이권 카르텔을 탓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놓고 수건돌리기를 하는 경찰 등 관계 당국의 행태는 ‘극한 무책임’의 전형이다. 상처 난 민심에 소금 뿌리기다. 무너진 교권의 원인을 학생인권조례에서 찾는 건 또 어떤가.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자기 아이만 감싸며 악성 민원을 퍼붓는 ‘극한부모’를 낳은 무한경쟁 사회의 폐해부터 줄여나가야 하지 않을까.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은 앞으로 10년, 윤 정부의 운명을 가르는 시간은 앞으로 3년이다. 극한정국을 바로잡는 데 3년은 절대 짧지 않다. 치킨게임으로 이득을 본 정권은 없었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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