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은의 트렌드터치] 휩쓸리지 않을 권리
공개 2주 만에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1위에 오른 드라마 ‘사냥개들’은 복서의 심장을 부르짖는 주인공 건우(우도환)의 순수함과 소신으로 전 세계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어둠의 세계에 얽힌 누아르 서사와 다소 잔인한 장면을 상쇄할 정도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성실하고 우직한 해병대 출신 복서를 연기한 배우의 리얼한 수준급 액션과 운동으로 다진 강인한 근육은 시종일관 몰입감을 높였다.
실패할 확률을 줄이고 싶어 가장 효율적인 지름길과 정답만을 찾아 코칭과 추천을 갈구하는 이른바 ‘실패회피세대’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맨주먹 하나로 약자의 편에 서서, 아무리 비열한 무기 앞에서도 오로지 주먹만으로 승부를 보는 주인공 건우의 소신은 시청자들의 잠들어 있던 정의감을 깨웠다. 감독은 청년을 통해 잊고 있던 시대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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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게 급변하는 불확실 시대
정보 홍수에 중심 잡기 어려워
‘약자’에 대한 관심은 유지해야
동물·기후 등으로 시야 넓혀야
」
독일 철학자 헤겔이 설파한 시대정신(Zeitgeist)은 어떤 시대를 관통하는 절대적인 정신을 말한다. 변동성(volatile), 불확실성(Uncertainity), 복잡성(Complexity)과 모호성(Ambiguity)으로 대표되는 VUCA의 시대, 생성형 AI의 놀라운 진보를 마주한 우리가 지켜야 할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자본이든 정보든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승자독식에 기인한 부익부 빈익빈의 간극이 더욱 커지는 현실 속에서 ‘약자(弱者)’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이 시대에 약자는 단순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고 신기술이 쏟아지는 오늘날 디지털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디지털 약자, 과도한 산업화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야생동물, 코로나 기간을 버텨내고 회생을 위해 다시 한번 도약하는 소상공인, 이상기후에 기형화되어가는 지구의 생물까지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약자는 재정의되고 재조명되어야 한다.
일례로 오픈AI의 창시자 샘 올트먼은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을 위한 월드코인을 발표했다. 보편적 기본소득이란 경제적 약자를 선별해 차등지급하는 선별적 복지와 달리 모든 국민에게 일정량의 현금이나 이에 준하는 재화를 제공하는 복지제도다. 그는 홍채 인식을 하는 누구에게나 가상자산(암호화폐)인 월드코인을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특정 국가에서는 이를 위해 180만여 명이 월드 ID를 발급받았다. 생성형AI의 대표주자 챗GPT를 만든 주역으로서 AI 발전이 가지고 올 일자리 손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마련하고 AI로 창출된 가치를 재분배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은 미래의 약자를 재정의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대륙을 막론하고 ESG가 정책적·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면서 모두가 친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무적이지만 동시에 특정 국가나 기업들의 진정성 없는 홍보성 녹색경영으로 그린 워싱(Green Washing)의 문제가 대두하였다. 최근에는 PC(Political Correctness) 역시 워싱의 대상으로 떠오르며 논란이 되고 있다. PC는 ‘정치적 올바름’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리 주위에 잠식해 있는 모든 종류의 편견을 없애자는 의도로 생겨난 움직임이다. 인종·성별·문화·종교 등 다양한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 비뚤어져 있는 기준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특히 할리우드 같은 대중문화에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데, 디즈니의 영화 ‘블랙팬서’는 마블의 흑인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다양성과 PC주의로 영화계를 각성시켰다. 하지만 흑인 인어공주와 흑인 팅커벨까지 등장하자 오히려 역차별 논란으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원작을 무시하고 백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화이트 워싱’이 우세했다면, PC의 움직임으로 최근에는 오히려 ‘블랙 워싱’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를 강요받는 듯한 느낌에 팬들은 반감을 일으켰다. 그린 워싱, PC주입 모두 확고한 소신의 부재로부터 시작된다. 혼돈의 시대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힘이 필요하다.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 빼고는 모든 것이 변한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동요하거나 일희일비하지 않고 뚜렷한 의지와 주관으로 눈앞의 이익보다 소신을 지키는 신념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트렌드의 홍수 속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트렌드라 할 수 있다.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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