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 띄우는 중국 “조선 전장 달려가자” [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지난 15일 단둥(丹東)시에서 북한 신의주가 내려다보이는 잉화산(英華山)을 올랐다. 정상에 덩샤오핑(鄧小平) 필체로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도왔다며 한국전쟁을 일컫는 중국식 명칭) 기념탑’ 일곱 자를 금색으로 새긴 53m 탑이 보였다. 70년 전 1953년을 상징한다.
탑 옆으로 지난 2020년 9월 재개관한 항미원조기념관(이하 기념관) 본관이 자리한다. 한국전쟁을 놓고 북·중 혈맹을 넘어서 애국주의와 반미(反美)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대만 통일까지 염두에 두고 교육을 하는 현장이다. 주말을 맞아 6000명 예약이 마감돼 되돌아가는 관광객도 적지 않았다.
━
中 단둥·선양, 한국전쟁 부각 한창
“조선 전장으로 달려가자. 애국 생산 경쟁 운동을 전개하자.”
기념관 1층 ‘항미원조 운동청(廳)’에 걸린 선전 문구다. 한국전쟁 당시 전개된 전시 총동원 체제를 보여주는 전시물과 구호성 설명이 가득했다. “조선 내전이 폭발한 뒤 미국이 조선과 중국 영토인 대만을 무장 침입하자, 중국 인민은 각종 형식으로 미국의 침략에 항의했다.”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사상의 선전과 교육에 따라 군대에 지원하고 전쟁에 참여하려는 열기가 끓어 넘쳤다.” “부모는 자녀를, 부인은 남편을 보냈으며, 형제가 앞다퉈 참전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흔했다” 등이다. 한국전쟁 투입을 위해 펼쳤던 인적·물적 동원 캠페인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기념관의 전시는 북한이 주장하는 한국전쟁 논리를 따랐다. 2층 정전협정 부분에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김일성, 펑더화이(彭德懷) 중국군 사령관이 서명한 정전협정 문건이 보였다. 벽에는 “(중국군의) 전쟁터에서 생사를 건 결투와 힘겨운 정전 담판 투쟁으로 미국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려는 목적을 실현하지 못했다. ‘침략군’은 어쩔 수 없이 한국 전장에서 실패할 운명에 처했다…항미원조 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며 ‘정전=승리, 유엔군=침략군·점령군’이라는 논리를 주장했다. 이는 북한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전 발발도 자의적으로 설명했다.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파병과 조선 침입을 선포했다. 또 제7함대를 파견해 중국 대만해협을 침입했다”며 “7월 7일 미국 당국이 유엔 안보리를 조종해 ‘유엔군’을 조직하는 불법 결의를 통과시켰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 강조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주도했다. 지난 2010년 10월 이른바 항미원조 출국(出國) 작전 60주년 좌담회에서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2020년 70주년에는 기념대회로 격상하며 항미원조 정신을 제시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애국주의, 죽음을 불사하는 혁명 영웅주의, 고난을 두려워 않는 낙관주의, 사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충성 정신,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국제주의 정신을 포괄한다며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기념관엔 마오쩌둥에게 참전을 요청하는 김일성 친필 편지도 있었다. 안내원은 “편지 진본은 국가당안관에서 보관 중”이라며 사본이라고 설명했다.
“미·중 경쟁에 한국전 가치 높아져”
중국 국정 교과서의 한국전 서술도 기념관과 같다. 중국 8학년(중2) 역사 교과서는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고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켰으며 아시아 및 세계 평화를 수호했다”(p.11)고 서술했다. 양갑용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2017년 새로 개정된 8학년 역사 교과서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전했으며 중국의 기여로 승리한 전쟁이라고 강조했다”며 “미·중 경쟁 국면에서 한국전쟁의 활용 가치가 높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전쟁의 미화는 선양(瀋陽)에 조성된 ‘항미원조열사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4일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후금(後金) 홍타이지가 묻힌 베이링(北陵) 공원 인근의 한국전 참전 중국군 묘지를 찾았다. 중앙에 세워진 기념비까지 1차~5차 전투, 하계 반격 전투(1953.5.13~7.27) 등 중국이 한국전쟁을 구분하는 명칭을 석판에 새겼다.
묘지 북쪽에는 한국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송환한 중국군 유해 913구를 안장한 기념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주위에는 높이 3m의 검은 화강암 138개에 한국전 전사자 20여만명의 이름을 새긴 이른바 열사영명장(烈士英名墻)을 세웠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1922~1950)의 이름도 보였다.
묘지 서쪽 기념관에는 단둥의 기념관과는 달리 중국군 유해 송환 사업을 “영웅 귀환”이라며 대대적으로 부각해 전시하고 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와 코로나19에도 유해 송환은 그간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1년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국군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기 위해 지난달부터 실무 협의를 요청했지만 중국 측이 지금까지 답변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오는 27일 북·중이 평양에서 거행할 이른바 ‘전승절’ 70주년 기념행사도 주목된다. 지난 60주년과 65주년에는 각각 중국 국가부주석과 외교부 부부장(차관)이 평양을 찾았다. 북·중간 고위급 인적 교류가 코로나19로 중단된 가운데 올해는 왕야쥔(王亞軍) 주북한 중국대사가 대리 참석할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양갑용 연구위원은 “관례를 깨고 중국의 고위 인사가 평양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미·중 관계 개선을 위해 북한의 양해 아래 중국이 미국에 호의를 표시하는 북·미 등거리 외교술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단둥 도심 ‘고려거리’ 문패 지워져
4년 만에 다시 찾아간 단둥은 큰 변화 없이 정체된 모습이었다. 다만 과거 남·북·중 삼각 교역이 활발하던 단둥 세관 앞의 ‘고려거리(高麗街)’는 문패의 글자까지 검게 지워져 한인 사회의 쇠락을 시사했다.
현지에서는 중국이 건설한 신압록강대교가 가을께 개통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 현지인은 “북한이 막고 있는 신압록강대교 개통을 중국이 인적왕래 재개와 연계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선양·단둥=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시속 100㎞로 아우디 박았다, 제네시스 명운 건 ‘쇼킹 광고’ | 중앙일보
- "촬영한다며 호텔 성폭행"…성인화보 모델들, 소속사 대표 고소 | 중앙일보
- "수요일 신림역서 한녀 20명 죽일 거다" 글 확산…경찰 추적중 | 중앙일보
- 이런 멘트 했다면 당신도 진상 부모…진단 체크리스트 나왔다 | 중앙일보
- 혼자 온 9세 돌려보냈더니 신고…동네 유일 소아과 "문 닫겠다" | 중앙일보
- "다 버겁고, 놓고 싶다"…서이초 사망교사 생전 일기장 공개 | 중앙일보
- 여자지만 '이런 다이아'가 좋다…최전방 여군 소초장 '남다른 꿈'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 중
- "1년 알바 뛰고 1조 챙겨가" 사우디 알힐랄, 음바페에 파격 제안 | 중앙일보
- 10살 아이 급류 휩쓸리자 뛰어든 소방관…그가 한 당부 | 중앙일보
- 바다 향해 추락하는 이맛…주말 매진사태 빚은 '해운대 핫플'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