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갈매기] "나만 없어 재능" 이런 몹쓸 마음에 시달릴 때
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 <편집자말>
[박은정 기자]
출근길,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회사 선배를 만났다. 몇 년 전부터 선배도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요즘은 뭘 연습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그만둔 지 조금 됐단다. 대신 최근에는 대학원에 진학해 퇴직 이후 도움이 될 자격을 얻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다시 피아노를 치는데 동기 부여가 되어 준 선배였다. 피아노를 즐기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기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왜 그만두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녀는 피아노가 주는 즐거움이 좋았으나 뚜렷한 목표와 실리적인 결과물이 없다 보니 차츰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선배를 만난 날은 마침 피아노 학원을 가는 날이었다. 퇴근 후 평소처럼 악보를 펼치고 건반 앞에 앉았다.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왼손, 오른손 따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눈은 악보를 따라가고 손은 음을 짚고 있지만 내 마음은 어딘가 저 먼 다른 세상을 헤매고 있었다.
사실 최근 나도 그랬다. 피아노의 시간은 무엇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내적 충만감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기쁨이고, 생활에 곧바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 시간과 비용을 좀 더 필요한 데 써야 하지 않을까?'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오기도 한다.
운동이라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실리적인 이득이라도 있지만, 피아노는 그런 것도 아니다. '연주하고 싶은 곡들을 배우고 익힌 다음에는 뭐가 있지? 전문 연주자가 될 것도 아니고, 이걸 배워서 도대체 무엇에 써먹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슬럼프에 빠졌을 때 좌절의 일상, 슬럼프는 성장의 기회 |
ⓒ Taychilla, Unsplash |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림책 쓰는 일이 잘 안 풀려서다. 시간도 부족하고 체력도 달리는데 해야 할 일은 많다. 회사와 가정의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주 2회, 퇴근길 한 시간씩 배우는 피아노를 줄인다고 더 많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글쓰기에 도움을 받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답답함에 피아노의 실리마저 따져보게 된 것.
그림책을 읽고 공부하다가 재작년부터 그림책을 써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수업을 들은 후 습작을 이어오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사회적 기준에서 선택한 직업과도 다른 일. 주변의 인정, 최고라는 칭찬이 없더라도 그만 두고 싶지 않은 일로 그림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잘 쓰든 못 쓰든 지도 작가님이 한 달에 한 번 열어주시는 합평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부족한 원고라도 쓰는 일을 이어왔다. 작년, 감사하게도 한 전집 프로젝트에 글 작가로 참여해 세 권의 그림책을 썼고, 현재는 단행본을 목표로 매일 쓰고 고치는 생활 중이다.
직장인이고 초등 저학년 아이를 키우는 엄마, 또 생활인이다 보니 제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은 새벽 한두어 시간. 써 놓은 원고들은 쌓여가지만, 여전히 좌절은 일상이다. 특히 최근 두어 달 가까이 많이 흔들렸다. 뭘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에게 슬럼프야 일상이지만 이번에는 꽤 센 놈이 찾아온 것이다.
왜 유독 힘이 드는가? 곰곰이 내 상황과 마음을 살펴보았다. 달리는 체력, 업무나 개인 생활의 바쁜 일정도 한몫했으나 실제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과 조바심 때문이었다.
자발적 동기로 시작해서 과정을 즐기며 꾸준히 해 온 이 생활은 어느새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남들의 인정과 평가가 어떻든 할 일을 하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도리어 성과가 꼭 필요한 일 앞에서 두렵거나 흔들릴 때마다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인정과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롭기가 쉽지 않았다. 모임에 들어가서 부족한 원고를 내고 의견을 주고받을 때마다 자꾸만 작아졌다. 더불어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 보고 싶지 않아도 확인하게 된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넘쳐나는 걸까? 비교가 조바심으로 이어지고, 재능이 없는 것 같은 나에 대한 의심이 찾아온다.
외적 압박을 내적 동기로
그러다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에세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를 마주하게 됐다. 1위 없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3위 수상자,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 셔먼의 제자이자, 현재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며 50년 넘게 활동하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런 분도 재능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을, 하루를 쉬면 도돌이표가 된다며 지금도 매일 열 시간 넘게 연습을 한다는 것을, 임윤찬, 손열음, 조성진 같은 젊은 후배들을 보면서 놀라움과 부러움을 느낀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감정을 포장하고 감추지 않는다. 어린 시절 천재들 앞에서 압도된 후, 남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좌절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일로 선택한 음악을 잊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자신만의 연주와 그 가치를 이어가겠다는 깊은 의지를 보여준다.
야구 심리를 다룬 <레전드는 슬럼프로 만들어진다>에서도 한국 야구 위원회(KBO)의 선정 기준에 따른 네 명의 선수(박정태, 김종모, 송진우, 김용수)가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하며 레전드가 되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들의 상황은 모두 달랐지만, 외적 압박을 내적 동기로 바꿔내어 슬럼프를 극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경험에서 저자는 메타인지(meta-cognition, 안다는 것을 아는 것)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아는 힘은, 자기 성찰에서 가능하다. 자기 일에 가치를 어떻게 부여하고 있는지, 성공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고, 내게 그 힘이 있다고 믿는 마음,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감정을 조절하고 상태를 점검하며 전략을 세울 수 힘은 바로 이 메타인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남들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 진짜 성장임을 깨달은 백혜선 피아니스트와 네 명의 선수들. 얼굴이 화끈거리는 스승의 평가, 선수 생활을 위협하는 심각한 부상이나 감독과의 불화, 가정사 등의 어려움이 닥쳤다. 하지만 그들은 외부의 인정이 아닌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내적인 동기로 슬럼프를 성장의 기회로 삼아 전설이 되었다. 슬럼프도 과정으로 여기고 게을리 연습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찾아온다. 엄청난 업적을 이룬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김연아 선수도 부상이나 전 국민의 관심이라는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대회 결과로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성취는 남들의 인정이 아닌 혼자 애쓴 꾸준한 연습의 힘이 뒷받침되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녀의 강인한 멘탈은 그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라이벌 아사다 마오가 구사하는 트리플 악셀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점프와 기술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대로다. 남들과 비교하며 다른 길을 기웃거리거나 비관할 것이 아니었다. 왜 이 일을 하고 싶은가를 거듭 질문하고 가치를 스스로 세우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매일 할 수 있는 만큼 해 나가는 것이 슬럼프를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내가 이겨야 할 상대는 바로 나 자신. 남들이 무엇을 얼마나 하는지 부러워하며 재능을 고민할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면밀하게 살펴야 할 때다. 지속하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나를 알 때야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 옛말이 하나 그른 게 없다. 슬럼프는 나를 대면하고 알아갈 수 있는 성장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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