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초보 운전자들이 보면 물개박수 칠 이야기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조성하 기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기나긴 장롱 면허의 끝을, 이젠 정말로 내야만 했다. 면허증만 손에 넣으면 당연히 운전대를 잡게 될 줄 알았는데. 이 아늑해 보이면서도 커다랗고 치명적인 기계에 내 운명을 통째로 맡기기엔 '아직은 좀 일러'의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어 용감하게 운전 연수 예약을 했을까. 어쨌든 해묵은 먼지를 털어낼 기회가 왔다.
▲ 불안한 마음에 핸들이라도 꽉 부여잡는 초보 운전자 |
ⓒ pixabay |
서늘한 실내였음에도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핸들을 고쳐 잡은 것을 빼면 수업은 꽤 순조로웠다. 내 침착한 자아가 겁도 사라지게 했는지, 며칠 뒤 예정된 여행에서 보조석을 남편에게 양보하고 강원도 평창으로 떠나기로 했다.
집에서 약 160km. 심호흡을 크게 하고 시동을 걸었다. 고요한 차 안은 내비게이션의 다정한 음성으로만 가득 메웠고, 불의의 사건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앞유리만 노려봐야 했다. 기어를 D에 놓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얼마나 흘렀을까. 줄곧 꽉 막혔던 도로에는 이제 나만 어설프게 달리고 있었다. 10시, 2시 방향으로 정직하게 놓인 팔이 중력을 버거워 하고, 무리한 전방 주시 덕분에 고개도 뻣뻣하고. 하필 원주를 지날 때쯤 비도 쏟아졌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잡아 드디어 추월 차선에서 화물 트럭을 앞지르고 무사히 주행 차선으로 돌아오는 순간, 저절로 올라간 내 입꼬리가 느껴졌다. 맨발로는 절대 밟을 수 없던 금단의 땅. 길고 긴 회색 물길을 유유히 가로지르자 어디선가 풍겨오는 은근한 소속감이 몸에 붙은 머리카락처럼 간질거렸다.
첫 장거리 운전을 시원한 대각선 주차로 마무리했다. 주차는 반복의 영역이라 열 시간 수업 중 마지막 두 시간을 과감히 건너뛰어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평일 오전 11시 면사무소 앞은 한적한 공터였다.
간만에 맑은 공기를 마셔서 그런가, 차에서 내려 평소와 사뭇 다른 진녹색 풍경을 보며 숨을 들이마시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퀴 달린 기계를 조작해서 모든 위험을 뚫고 내 몸을, 우리의 몸을 이렇게나 무사히 먼 곳으로 옮겨 놓다니.
대부분의 처음은 이랬다. 운전도, 달리기도, 재봉틀도, 지금 쓰는 이 글도. 낯선 것들은 유령처럼 겁부터 주며 선뜻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걸음마부터 아주 힘겹게 내딛던 과거를 떠올려야 한다는 것.
편안함을 외치는 스스로의 계략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다, 번뜩 용기가 생기는 시점이 온다. 아주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한 발씩 떼다 보면 나를 통과하던 것들이 서서히 스치며 닿게 된다. 그러다가 금세 붙잡아지고, 나의 뼈와 살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원래부터 한 몸인 듯 차지하게 되고. 조금씩 반죽을 붙여나가며 내가 만들어지는 재밌는 사실.
그러므로 배우고자 하는 용기는 마법같다. 무지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여 한 발짝 전진하게 해주는 반짝이는 마법. '모르는 게 약'과 '아는 것은 힘'의 팽팽한 평행선 위에서, 적어도 알고 싶은 마음과 노력이 지금 밟고 있는 바닥을 더 넓게 만들어 준 건 확실하다. 나에게 '익숙함'이란 붉은 빛 가득한 교통 체증 속 갇힌 느낌과 비슷했기에 그 속에서 벗어나 기꺼이 초보자가 되는 경험은 살아있다는 생동감을 선사했다.
▲ ‘초보자‘의 또 다른 의미는 ’가능성‘ |
ⓒ pixabay |
너와 나, 우리의 사이에서도 그랬다. 누군가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오직 초보의 자세로만 가능했다. 이미 알고 있다고 넘겨 짚는 순간 이리저리 엉킨 실뭉치가 되어 버리는 건 시간 문제다. 그래선 안 된다는 교훈도 초보자를 연습하며 터득하는 중이다. 클라이밍이나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기술보다 훨씬 더 익히기 어렵지만 말이다. 심지어 이건 자격증도, 레벨도 없다. 완벽히 마스터가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초심자의 운'은 확률과 도박에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 행운은 끈질기게 발견하려는 사람에게 성장의 즐거움을, 생명력을 건네준다. 나는 살아있고 조금 더 나아졌으며 앞으로도 더 성장할 거라는 가능성과 믿음에서 커다란 위로를 얻는다. 부드럽고 달콤한 디저트를 한 입 먹을 때보다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위로. 무엇을 알기 전의 나와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인간이기에.
물론 초보의 삶을 한껏 즐기기로 정했다면 엄숙히 다짐해야 할 것도 존재한다. 작은 노력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쉬운 성취감에만 중독되는 건 경계하기로. 마트 시식 코너에서 아무리 신제품을 한 입씩 받아먹어도 끼니를 해결할 수 없듯이, 인생을 맛보기로만 채우며 허비할 수는 없다.
언제나 최종 목표는 우아한 숙련자임을 기억한다. 동시에 발끝만 담그고 모든 것에 통달한 도사인 척은 낭떠러지로 직행하는 쉽고 빠른 길. 모름을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 얻게 되는 멋진 선물이 얼마나 무궁무진한데. 실패는 도전했기에 생기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부러 부지런히 처음을 수집해 본다.
이제 나는 걷고 뛰고 운전까지 할 수 있는 진화를 이루었다. 전혀 닿을 수 없던 곳을 직접 찾아갈 수 있는 능력, 조금 더 부풀리자면 날개 달린 초능력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새로 돋아난 작은 속삭임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했다.
작은 웅덩이 속에 가만히 고여 있다가 기다란 강 줄기로 흘러 닿을 거란 생각만 해도 산뜻해지는 마음. 멈춰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는 마음은 자꾸만 되새기고 싶은 근사한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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