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그냥 내버려두라 [마을학 各論]
[정기석 기자]
오늘날 한국 정부는 각종 정책공모사업을 통해 마을끼리 '개발' 경쟁을 붙인다. 자연발생적 집촌을 계획설정형 마을로 재편성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농정당국인 농식품부는 물론, 국토부, 행안부, 문화부 등 정부부처끼리도 '개발사업' 경쟁에 열심이다. 저마다 농촌마을과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중복적, 반복적으로 갖가지 유사한 지역개발사업을 자꾸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설정형 마을 재편성 작업은 한마디로 농촌지역개발사업으로 통칭할 수 있다. 농촌이라는 공간을 대상으로 지역의 '발전'을 위해 시행하는 각종 사업들로 정의된다. 구체적으로 농촌 지역의 문제해결을 통한 지속가능성 확보와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주민이사업의 주체로 참여하는 가운데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고 경제적 번영, 사회적 통합, 환경적 가치 고양 등을 도모하려는 개발사업이라 규정할 수 있다.
협의로는 주로 정주 측면에서 필요한 적정 수준의 시설과 서비스 공급에 한정된다. 광의로는 농어촌지역의 산업, 환경, 공동체 문제 등 농촌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발행위까지 다룬다.
▲ 사천 거북선마을 거북선 최초 출전지라는 역사적 공간이 마을자산인 ‘사천 거북선마을’ |
ⓒ 정기석 |
마을은 '개발공간'이 아니라 '생활공간'
이러한 영국의 '농촌백서(rural white paper)' 등에서 규정한 농촌지역개발사업의 목표(Vision)는 농촌지역사회가 활기차고 질 높은 공공서비스를 수행하는 '살기 좋은 농촌(living countryside)', 경제다각화로 높고 안정된 수준의 고용혜택을 향유하는 '일하는 농촌(working countryside)', 환경이 유지되고 고양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보호된 농촌(protected countryside)',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활력있는 농촌(vibrant countryside)' 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른바 한국농촌지역개발사는 2000년대 이전과 이후로 경계를 나눌 수 있다. 2000년대 이전인 1962년 이후 제7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계획, 1972년 이후 제4차 국토개발계획 과정에서 농촌정책 보다는 농산업정책에 편향됐다. 농촌정책은 농업정책의 보조적 역할로 기능, 읍·면단위 및 마을단위의 생활환경 정비를 목적으로 물리적 개선 목적의 하향식, 하드웨어(토건) 사업에 집중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참여정부에서 의욕적으로 농업·농촌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했다. 정책대상이 농업에서 농업·식품·농촌으로 확대되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내생적' 발전전략이 추진되면서 사업의 통합과 예산의 통합이 시도됐다는 사실은 의미가 크다.
시대별로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960년대까지는 지역사회개발(CD)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마을 범위에서 하향식으로 농업지도나 생활환경 개선 등의 사업이 시행되었다. 지역사회개발요강(대통령령), 농촌진흥법, 농업기본법, 농촌근대화촉진법, 지역사회개발법 등 법적 근거도 본격 마련됐다.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으로 대변된다. 마을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마을범위의 시업이었으나 근본적으로 정부의 일반 하향식 방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농업생산 확대, 생산기반 개선, 생활환경 개선, 자원개발 및 소득증대 등을 정책목적으로 내걸었다.
1980년대 들어 종합적인 농촌지역개발이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마을범위를 벗어나 시·군으로 사업범위를 확대한 하향식, 외생적 성격의 사업추진 방식이었다. 생활환경 개선, 생산기반 개선, 농촌산업화, 농외소득 기반 다양화 등을 목적으로 농어촌소득원개발촉진법, 도서개발촉진법, 오지개발촉진법,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 도서종합개발 농어촌종합대책, 오지종합개발, 소도읍개발, 정주권개발 등 '계획설정형 마을'을 위한 법률과 정책이 양산됐다.
▲ 상주 모동마을 폐쇄된 보건소를 마을도서관으로 재생한 ‘상주 모동마을’ |
ⓒ 정기석 |
2000년대 이후 상향식, 내생적 정책패러다임 전환을
2000년대의 정책목표는 복합생활공간 개발 및 삶의 질 향상이었다. 기존의 하향식 일변도 사업추진 방식에서 상향식, 내생적 방식의 정책패러다임이 적용되었다. 마을, 권역, 읍면 단위에 걸쳐 생활환경 정비, 지역특화 농촌자원 개발 및 산업화, 도농교류, 통합적 농촌개발 등 다각적 사업목적을 설정, 지방소도읍육성지원법, 농림어업인의 삶의 질 향상 및 농산어촌지역 개발 촉진에 관한 특별법, 도시와 농어촌간의 교류촉진에 관한 법률, 농어업, 농어촌 및 식품산업기업법, 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등이 제정됐다.
이에 따라 어촌체험마을, 접경지역개발, 지역특화품목육성, 아름마을가꾸기, 정보화마을시범마을, 녹색농촌체험마을, 농촌전통테마마을, 소도읍육성, 농촌마을종합개발, 어촌마을종합개발, 문화역사마을, 전원마을조성, 신활력, 지역농업광역클러스터, 농어촌테마공원조성, 거점면소재지마을종합개발, 농어촌뉴타운조성 등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다양한 사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설계하고 시행했다.
2010년대 이후에는 통합적 농촌개발과 지역간 연계를 목표로 자율적, 네트워크형 마을을 지향했다. 권역, 읍·면, 연계 지역 등에 걸쳐 농촌융복합산업, 지역간 연계 협력사업 등은 물론 심지어 도시재생뉴딜사업, 어촌뉴딜사업 등이 농어촌지역의 주요 거점 읍·면마다 시행되고 있다.
2020년대 이후에는 농촌공간의 체계적·효율적 토지이용이 가능하도록 농촌의 일정 지역을 용도에 따라 구획화(zoning)하는 농촌특화지구 도입, 농촌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지원에 관한 법 제정, 일부사업의 지방위양에 따른 농촌공간 전략계획 및 농촌생활권 활성화계획 농촌협약 등이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계획설정형 마을의 현주소, 또는 농촌지역개발사업의 현주소는 결코 성공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우선 이른바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 정책이 하향식, 관주도, 토건형 모델로 설계된 태생적인 한계와 오류가 문제다. 한국의 농촌지역개발사업은 1970년대 물리적 환경개선 위주의 개발지향적 '새마을운동'으로 본격화됐다.
1980년대 들어 농촌정주생활권 개발, 농공단지 등 농촌공업화, 소도읍 활성화 등 공업화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1990년대는 농지제도 폐지, 개발제한구역 해제 등으로 농촌지역 난개발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비로소 2000년대 들어 국토균형발전, 상향 공모식 농촌지역개발사업 등의 전향적 정책이 도입되었으나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중앙정부에 예속된 유사·중복 사업의 주체 간 갈등과 시행착오가 끊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2000년대 이후 농식품부를 비롯해 농진청, 행안부, 문화부, 국토부 등의 각종 농촌지역개발 유사·관련사업이 중복적으로 양산되었다. 이에 따라 부처 간 헤게모니 다툼, 중앙과 지방의 불협화음, 행정과 주민의 갈등만 야기하며 파행과 시행착오의 사례가 난무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개발'이라는 토건적, 전지행정용 관성과 관행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또한 지자체가 중앙정부 예산에만 의존하다보니 타율적인 단기사업에 치중할 수 밖에 없다. 지역에서는 중장기적인 비전과 전략이 부재한 상태로 단위사업 형태의 단기사업을 반복, 대부분의 사업비를 중앙정부에 의존해 지역별로 독자적·자율적·창의적 사업의 계획이나 추진도 사실상 어려웠다.
▲ 하동 입암마을 유휴농기계창고를 마을주민이 사재를 털어 마을미술관으로 재생한 ‘하동 입암마을’ |
ⓒ 정기석 |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정책설계와 사업모델의 오류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 실행모델의 한계도 뚜렷하다. '마을만들기'등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취지와 목적을 '산업적인 농촌관광지화' 또는 '상업적인 생태공원화' 등 물리적인 성과물 조성사업과 동일시함으로써, 하드웨어 조성 위주의 토건사업에 집중했다.
그 결과, 외부인(도시민 체험객, 선진지 견학단, 공무원 시찰단 등)의 구경거리나 체험거리에 불과한 신원미상, 정체불명의 조악한 관광지, 공원 등이 전국 도처의 마을과 지역에 산재되어 사실상 유휴시설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 시스템의 문제도 심각하다. 상부의 비전문 행정조직과 외부의 상업적 용역업체가 주도하는 예산시혜성 사업목적과 전시행정용 사업평가 위주의 '토건식, 관광용, 도시형 관제 농촌지역개발' 사업시스템이 고착되었다. 상부의 평가용, 외부의 소비용 '마을만들기'가 아닌 내부인(원주민, 귀농인, 출향인 등)의 생활과 생존을 보장하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회적이고 생태인 마을살이 또는 마을살리기'로 사업의 계획, 추진 시스템을 이미 재정립했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형 농촌지역개발사업' 책임운영주체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마을공동체사업 등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성패는 곧 사업의 3대 책임주체인 '행정, 주민, 전문가'의 자세와 역량의 정도로 결정되는데, 행정은 사업에 임하는 진정성과 지원역량의 미흡, 주민은 사업에 대한 이해도와 내발적 역량의 부족, 이런 행정과 주민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지원하는 역할의 전문가 집단은 전문역량과 책임소재의 미흡이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상존하고 있다.
마을의 주인이자 마을사업의 주체인 마을주민도 준비와 공부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농민 등 농촌지역 주민'들이 미처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사전 준비와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관련 사업에 선정되고 지원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지역과 농촌마을이 농촌공동체 지역개발사업으로 성장, 발전, 자립할 수 있으려면 최소 몇 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고 주민은 학습하고 훈련하면서 그동안 교육, 컨설팅 등 행정이나 외부 지원조직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심과 지원이 선행될 필요하다.
하지만 농촌지역개발사업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전무한 마을에 수십억원 규모의 사업이 지원되는 사례도 흔히 목격되고, 심지어 한번 정책사업을 지원받은 마을이 여러 부처의 다양한 사업을, 그러나 유사한 사업을 중복적으로, 집중적으로 받는 사례도 다발하고 있는 게 사업현장의 현실이다.
행정과 주민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야할 이른바 '전문가'의 역할과 성과도 행정과 주민의 요구와 기대에 미달한다. 더욱이 2004년 이후 단일사업 최대 100억원 규모의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이 시행되면서 농촌지역개발관련 전문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해 전문가의 개념과 관련 컨설팅시장이 교란되는 양상마저 심화되고 있다.
▲ 서귀포 신산리 마을공동체에서 마을카페를 직접 운영하는 ‘서귀포 신산리마을’ |
ⓒ 정기석 |
사회적 자본이 없는 마을은 공동체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농촌지역사회에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거나 부재한 것은 숙명적 문제다. 한국의 전통적 농촌지역 마을공동체에서는 연대적(결합, Bonding) 사회적 자본과 교량적(연결, Bridging) 사회적 자본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마을 사회집단의 연대 의식이 높고 사회집단 간 협동적 관계가 원만하게 지켜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결합(Bonding) 사회적 자본은 또래, 같은 인종, 같은 종교와 같은 사회화 과정에 동일한 특성들 사이에 생겨나는 사회적 자본으로서, 다인종 사회에서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적 자본, 즉 연결(Bridging)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농촌지역개발사업을 위한 정부의 각종 지원정책이 시행되면서 마을의 한정된 자원 이용, 개발사업 참여 여부 및 정도, 이익 분배, 개발의 주도권 등을 둘러싸고 마을공동체 및 지역사회 내부에서 반목과 갈등이 표출되곤 한다. 따라서 농촌지역개발사업의 성공적 추진 및 성과를 위해서는 농촌지역사회 및 농촌마을공동체 안에 내재·축적된 사회적 자본의 여부 및 정도부터 스스로, 냉철하게 확인하고 시작해야 한다.
농촌지역사회 및 농촌마을공동체 내부에서 공동체 구성원끼리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연대하며.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나누는 한편, 공동체의 규범과 관계망을 형성, 강화함으로써 농촌지역 공동체의 문제 해결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는 유무형의 자산으로서 '사회적 자본'이 법, 정책, 제도보다 선행, 전제되어야 한다.
그 마을 내부에, 그 지역사회에 사회적 자본이 충분히 생산·축적·공유되지 않는다면, 계획설정형 마을로 재편성하는 농촌지역개발사업은 아예 벌이지 말아야 한다. 마을주민이나 행정은 마을공동체사업에 함부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마을을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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