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수제맥주…프리미엄 가치 앞세워 경쟁력 회복해야
편의점 채널 종속되며 정체성 잃고 소비자 외면
독창성과 개성 회복하고 맥주의 질 다시 높여야
한때 편의점 매대를 가득 채우던 수제맥주가 일본맥주에 밀리고 하이볼에 밀리며 방을 빼야 할 위기에 몰리고 있다. 편의점은 수제맥주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산업이 성장하는 데 고속도로가 되어줬지만, 반대급부로 판로를 종속시켜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했고, 결과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해 위기에 빠지는 상황을 초래하게 했다. 기로에 선 수제맥주가 다시 한번 날개를 달기 위해선 정체성을 상실한 편의점 맥주와는 선을 긋고,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제품으로 더디더라도 소비자들을 하나씩 하나씩 설득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빠진 수제맥주…1년 새 실적 ‘뚝’
23일 편의점 업계에 따르면 올해 국내 수제맥주의 매출액은 최근 몇 년과 비교해 큰 폭으로 꺾였다. CU의 경우 2019년 수제맥주 매출은 직전해보다 220.4% 늘며 성장세에 날개를 달았고, 2020년에는 신장률이 498.4%에 달하며 정점을 찍었다. 이후 2021년에도 255.2%로 고성장을 이어갔지만 지난해 60.1%로 성장세가 다소 주춤하더니 올해 들어 상반기 기준 신장률이 4.3%에 그치며 급전직하했다.
수제맥주의 부진은 다른 주종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상반기 CU의 수제맥주 매출신장률 4.3%는 주종별 순위는 물론 맥주 카테고리 내에서도 가장 부진한 성적이다. 상반기 위스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0.7% 증가했고, 전통주도 17.5% 몸집을 키우며 선전했다. 반면 맥주 매출은 7.8% 늘어나는 데 그치며 부진했는데, 수입맥주가 11.6%의 높은 성장세를 보인 것을 고려하면 수제맥주의 부진이 맥주 전체 성적표에도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수제맥주의 인기가 주춤하다 보니 업계의 대표 격인 업체들의 성적도 엉망이다. 2021년 수제맥주 업계 최초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제주맥주는 상장 이후 영업손실 규모가 커지고 있다. 제주맥주는 지난해 영업손실이 116억원으로 2021년(72억원)보다 60.2% 불어났고, 매출은 240억원으로 16.9% 감소했다. 올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1분기 매출은 4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5.4% 쪼그라들었고, 영업손실은 21억원으로 39.3% 늘었다.
실적이 악화일로를 걷다 보니 최근에는 강도 높은 인력 구조조정에 나섰다. 제주맥주는 지난 12일 전체 임직원의 40%에 대한 희망퇴직 절차 등을 포함한 경영 쇄신안을 임직원에게 공지했다. 회사는 희망퇴직 신청자에게 근속 연수에 따른 위로금을 지급하고,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며, 대표이사는 급여 전액을 반납하기로 했다. 제주맥주가 앞으로도 부진을 이어간다면 최악의 경우 상장폐지 절차를 밟을 수도 있다. 한국거래소는 코스닥 상장사의 적자가 5년 연속 이어지면 상장폐지를 적용한다.
세븐브로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븐브로이는 올 1분기 매출이 53억원으로 1년 전(101억원)과 비교해 반토막이 났고, 영업이익은 5억원으로 83.3% 감소했다. 세븐브로이는 2020년 대한제분과 상표권 계약을 맺은 후 ‘곰표밀맥주’를 출시해 누적 5800만캔 이상 판매하며 수제맥주 돌풍을 주도했다. 하지만 지난 3월 상표권 사용 계약기간이 만료되며 양사의 관계는 틀어졌다. 세븐브로이는 공정거래위원회 신고와 판매금지 가처분 조치를 신청하며 소송전에 나섰지만 매출의 90%를 의존하던 곰표밀맥주가 사라져버린 만큼 타격은 불가피해 보인다.
수제맥주가 현재의 위기상황으로 몰린 근본적인 원인은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수제맥주란 독립자본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방식으로 생산한 맥주를 말한다. 대형 주류기업이 생산하는 페일·라이트 라거 위주의 맥주가 아닌 맥주의 기본재료인 몰트와 홉, 효모는 물론 다양한 과일이나 허브 등을 자유롭게 사용해 양조장별로 개성 있는 스타일로 맥주를 만드는 게 수제맥주의 정체성이다. 소비자들이 처음 수제맥주에 환호했던 이유도 다양성과 독창성 등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우는 수제맥주의 정신과 이를 토대로 만들어내는 고품질의 맥주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거치며 모든 게 달라졌다. 기존 수제맥주 전문점과 펍 등 유흥채널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수제맥주는 영업제한에 산업의 뿌리가 흔들렸고, 주류유통이 가정채널로 사실상 제한되면서 마트나 편의점 등으로 판로를 개척하며 살길을 모색하게 됐다. 다행히 일본맥주에 대한 불매운동과 맞물려 빈자리를 파고들기에 용이했고, 곰표밀맥주 등이 흥행하며 새로운 채널에 안착하는 데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동아줄인 줄 알았던 편의점 채널은 수제맥주의 성장을 제한하고, 무엇보다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든 원인이 됐다. 편의점 채널의 ‘4캔 1만1000~2000원’이라는 마케팅 정책에 따라 납품단가의 상한선이 정해지면서 업체별 특색을 보여줄 수 있는 고품질의 맥주는 생산단가를 맞추기 어렵게 됐고, 납품단가를 맞출 수 있는 저풍미의 ‘콜라보 맥주’만 넘쳐나게 됐다. 장점을 내던지고 개성 없는 다양성에만 집중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성 맥주와의 차이점이 모호해졌고, 타 주종과 맞설 수 있는 경쟁력도 상실하게 됐다. 편의점과 소비자 모두 외면하기 시작했지만 판로가 종속된 일부 업체들은 트렌드에 대응한다는 미명하에 맥주를 만들던 생산시설에서 이제는 하이볼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결국 수제맥주가 이대로 고꾸라지지 않고 반등을 이뤄내기 위해선 정체성 회복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우선 다양하고 풍성한 맛과 향이 기성맥주와 차별화되는 수제맥주의 정체성인 만큼 양질의 맥주 생산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편의점 채널에 종속된 저품질 수제맥주로는 상황을 타파해나갈 수 없기 때문에 기본으로 돌아가 고품질의 맥주를 만드는 게 최우선”이라며 “제품이 받쳐주지 않은 상태에서 마케팅을 강화하고 법령을 바꿔 지원을 해준다 한들 산업 발전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수제맥주를 재정의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맥주 제조사들은 생산설비 등의 규모에 따라 소규모제조면허나 일반제조면허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편의점 등 가정채널에 주로 납품하는 업체들은 일반면허를, 유흥채널 비중이 높은 업체들은 소규모면허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수제맥주의 기준을 소규모면허사업자로 조금 더 엄격하게 구분해 정체성 회복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수제맥주협회 차원에서도 논의가 진행 중이며, 업계 내에서도 수제맥주의 기준에 대한 재정비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높은 상황이다.
이인기 한국수제맥주협회장은 “초창기 수제맥주를 찾는 소비자들은 기성 상업맥주와는 차별화된 품질에 매력을 느낀 것인데, 편의점 채널에 종속되며 상업맥주와 똑같은 방식으로 맥주를 만들고 팔다 보니 가치가 떨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협회를 중심으로 업체 간 연대를 강화해 나갈 뜻을 밝혔다. 그는 “협회 내 기술·수출·홍보 분과를 조직해 양조기술을 지원하고 수출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등 수제맥주의 가치를 다시 바로 세울 수 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협회 차원에서 다양한 지원을 통해 서로 돕고 공생할 수 있는 탄탄한 생태계를 만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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