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수업' PD "화려한 출연진 섭외 비결은 배드민턴"
[오수미 기자]
▲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허성호 CP 인터뷰 이미지 |
ⓒ EBS |
한국의 교육방송이 제작한 한 프로그램이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방송 역사상 유례 없을 정도로, 세계 방송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EBS1 채널에서 평일 오후 11시 40분부터 20분간 방송되는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아래 <위대한 수업>) 이야기다.
EBS 교양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은 정치, 경제, 사회, 철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해 온 세계 최고의 석학들을 초청해 그들의 강연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한다. 지난 2021년 8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방송된 <위대한 수업>은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지난해 8월 시즌2 제작으로 이어졌다.
<위대한 수업> 제작을 총괄하고 있는 허성호 팀장(CP)을 지난 18일 온라인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미국 뉴욕 호텔에 도착한 직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게 된 그는 "국제무역 경제학의 대가인 미국 컬럼비아 대학 자그디시 바그와티 교수를 만나러 왔다. 코로나19 이후 세계 무역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주제의 강연을 촬영하려 한다"고 입을 열었다.
7월 중에 시즌2 종영을 앞두고 있는 <위대한 수업>은 어느덧 시즌3 제작이 진행 중이다. 동물학자 제인 구달의 강연으로 문을 연 시즌2에서는 <타이타닉> <아바타> 등을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중국 문학의 거장 위화 등 이번에도 화려한 라인업을 완성해 냈다. 자연히 시즌3에 대한 기대도 높아졌을 터. 허 CP는 섭외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다가도 어제 거절당한 석학이 꿈에 나올 정도"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시즌1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다는 허성호 CP는 3년째 일 년의 절반 이상을 섭외와 촬영을 위해 해외에서 보내고 있다. 그는 "시즌1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출·입국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반년 정도 해외에 있었다. 시즌2 역시 1년의 절반 정도를 해외에서 보냈는데 짧게 찍고 한국에 가서 후반 작업을 하고 다시 나갔다가 들어오는 식이었다. 올해 역시 (7월) 현재까지 해외에 있는 기간이 더 많았다. 지금은 시즌3 준비 기간이라 1년 중에 가장 바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미국 출장은 일주일인데 독일로 갔다가 다시 미국에 와서 하나 더 촬영하고 귀국하는 일정이라, 일주일씩 총 3주일을 촬영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시즌3 방송까지 약 한 달 가량의 시간이 남았다. 열심히 하고 있지만 아직 부진한 상황이다. 앞으로 한 달 동안 굉장히 빨리 달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이클 센델-유발하라리 섭외 비하인드
폴 크루그먼, 마이클 샌델, 유발 하라리, 리처드 도킨스 등 세계를 이끄는 지식인들을 한 자리에 모은 섭외력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공영방송 EBS가 엄청나게 비싼 출연료를 지급할 수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라인업이 가능했을까.
허성호 CP는 "사람마다 섭외에 응하는 유형은 다양하지만 물론 돈으로 할 수 있는 섭외가 가장 쉽다. 하지만 저희는 그런 걸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호소력 있는 레터를 써야 했다. 석학의 생애 전반에 대한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이걸 농축시켜서 쓴 제안서를 쓴 다음, 연구실에 연락을 할까, 인맥을 통해 접촉해 볼까 그런 고민을 한다. 시즌 1에 등장한 엄청난 석학들 중에는 인맥의 힘으로 접근한 사례들이 많다"고 밝혔다. 이어 허 CP는 그 엄청난 인맥의 연결고리로, 국제정치학의 대가인 비노드 아가왈 교수와의 15년 전 배드민턴 인연을 소개했다.
"제가 대학생일 때 비노드 아가왈 교수님이 연세대학교 방문교수로 오신 적이 있다. 그때 연세대 행정학과에서 근무하셨던 구민교 교수님이 '아가왈 교수님과 배드민턴을 좀 같이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저는 당시에 영어도 서툴렀는데 교수님과 교양 배드민턴 수업에 들어가서 학생들과 함께 배드민턴도 치고, 외교부에 자문을 하러 가신다기에 외교부에 모셔다 드리고 한국 과자를 사고 싶다고 하셔서 구멍가게에 가서 과자도 골라드렸었지. 2년 전에 <위대한 수업>을 시작하면서 지금은 서울대에 계신 구민교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때 교수님이 아가왈 교수님께 연락을 해주셨다. '그때 배드민턴 치던 학생이 지금 PD가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더라.
당시 교수님이 저희가 쓴 섭외 이메일 초안을 완전히 난도질해서 수정해 줬는데 그걸 지금도 섭외할 때 기본 양식으로 사용한다. 저는 동양적으로 겸손하고 저자세의 메일을 썼다면 아가왈 교수님은 직설적으로 출연료부터 본문에 명시하고 시작하더라. 하루에도 세계적인 석학들의 메일 박스에 수백 개의 메일이 올 텐데, 저희처럼 겸손을 떨었다가는 그대로 휴지통 행이다. 어떻게 하면 메일이 읽히는지 처음 알려준 분이었다. 더구나 아가왈 교수님이 미국 학술지 편집장을 맡고 계셔서 미국 정치학계에서 발이 넓으셨다. 그분이 섭외해 주시면 성공률이 백 퍼센트다. 제가 연락했다면 냉정하게 거절당했을 학자들도 모두 섭외에 응해줬다. 제 섭외력에 대해 물으실 때마다 아가왈 교수님, 구민교 교수님과의 배드민턴 인연이 생각난다. 제가 만약 15년 전에 모든 걸 옳고 그름의 잣대로 보면서 '그건 옳지 않습니다, 갑질입니다'라고 뻣뻣하게 굴었다면 아마 이런 일은 없었겠지. 지금 PD가 되어서 생각해 보니 학교 다닐 때 제일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웃음)."
화려한 석학들의 이름은 분명 감탄할 일이지만 반면 출연자가 백인 남성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허성호 CP 역시 그러한 비판에 대해 알고 있다며 "제작진도 고민을 많이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시즌 1에서는 코로나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고 섭외가 가능했던 분들 위주로 강연을 제작하다 보니 '백인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많아졌지?' 했다. 제작진도 많은 여성, 유색인종 학자들에게 연락을 돌렸지만 섭외가 정말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허성호 CP 인터뷰 이미지 |
ⓒ EBS |
시즌마다 1년에 가까운 시간을 쏟아붓는 <위대한 수업> 제작인원은 전 세계에 있는 촬영 스태프들을 포함하면 100명이 넘는다. 그러나 국내에서 제작에 주력하는 상주 인원은 35명 정도에 불과하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PD 한 사람이 석학을 만나기 위해 해외로 출국하고 대개 현지 스태프들을 섭외해서 촬영을 진행하는 방식이라고.
허 CP는 "현지 스태프들은 옥석을 잘 가려 뽑아야 한다. 한국과 달리 (인건비가) 높다고 잘 찍는 것은 아니더라. 한국식 제작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스태프들도 있다. 잘 어르고 달래고 한국 음식도 먹이면서 촬영한다"고 귀띔했다.
수많은 제작진과 석학이 대여섯 시간을 함께 촬영하더라도, 실제로 방송에는 20분 내외의 짧은 강연이 5, 6강에 나뉘어 공개된다. 강연자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2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강연 한 편이 탄생하기까지 제작기간은 평균 3개월이 걸린다고. 허 CP는 "제일 먼저 번역이 나와야 하고 또 그 번역을 검수한다. 그 분야를 해당 국가에서 전공한 한국의 뛰어난 연구자들이 직접 검수해서 '이런 내용은 적절하고, 이 내용은 논란이 많다' 등의 코멘트를 주신다. 그걸 바탕으로 후반 작업을 한다. 출연자들마다 강의력이 천차만별이라 이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편집의 노하우다"라고 자신했다. 이어 <위대한 수업>의 후반 작업은 EBS가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관심 있을 법한 주제를 세계 최고의 연구자 석학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방송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이해를 빠른 시간 내에 도와야 하는데, 한 문장은 몇 초 만에 지나가니까 그게 머릿속에 무슨 내용인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이해가) 쉽지 않다. 그래서 CG, 자료화면 등을 최대한 많이 넣으려 한다. 외국의 강연 프로그램은 출연자의 원맨쇼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는 후반 작업에 굉장히 힘을 쏟는다. 섭외는 섭외대로 힘들고 촬영은 촬영대로 힘들지만 가장 힘든 게 후반 작업이다.
<위대한 수업>은 EBS가 10여 년간 <다큐 프라임>과 같은 교육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제작해왔던 네트워크와 노하우의 산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기피하는 과학 주제의 다큐멘터리도 굉장히 많이 제작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쉽고 빨리 잘 전달할 수 있는지 노하우가 있다. 제작진끼리는 대체 불가능한 업무를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위대한 수업>에는 평생 연구에 매진한 석학들뿐만 아니라 제임스 카메론 감독, 글로벌 향수 브랜드 CEO 조 말론 등 다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유명인들이 초정되기도 했다. 허 CP는 "저희가 주로 학자를 (강연자로) 선정하지만 이 분들도 그 분야에선 석학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앉아서 하는 공부만 공부는 아니니까"라고 말했다. 이러한 뜻에서 시작한 유명인들의 섭외였지만 정작 난관을 맞이해야 했던 순간도 많았단다.
"일단 유명인은 (값비싼) 출연료를 만드는 게 어렵고 계약도 더 까다롭다. 유명인은 계약을 직접 하지 않는다. 우린 노련하기 짝이 없는 에이전시와 상대해야 하는데, 이들은 미국의 상업 방송국들과 협상해온 고도로 숙련된 분들이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대목들도 있다. 예를 들어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의 계약은 문장 하나 때문에 굉장히 지체되었는데, '출연자가 촬영현장에 나타나지 않아도 에이전시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촬영현장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데 출연자가 안 나타나면 허공에 수천만 원이 날아가는 꼴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잘못은 아니었고, 에이전시가 그만큼 노련하게 일을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타협해서 계약이 성사되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한국의 방송환경이 미국과 많이 다르구나 느낀다. "
'위대한 수업'이 전하는 가치
한편 <위대한 수업>은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연을 담는 만큼 대부분 영어로 진행된다. 당초 <위대한 수업>은 영어로 말하는 강연자의 목소리 위에 성우의 목소리를 입혀 더빙 버전으로 방송됐으나, 지난해 2월부터 자막 방송으로 변경되었다. 이를 두고 시각 장애인이나 자막을 읽기 어려운 노령 시청자들의 시청권을 무시한 처사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이 질문에 허성호 PD는 "굉장히 송구한 마음뿐"이라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더빙을 좋아하는 분이 있고 자막을 좋아하는 분이 있을 수 있다. 제작진 사이에서도 방향을 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취향이 나뉘었다. 다만 일단 시청자 분들께 석학의 육성을 실제로 들려드리려고 했다. 한국어로 더빙을 하면 문장 구성에 제작진의 개입이 (자막 번역보다) 더 많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 출연자의 육성을 듣고 싶다는 요구도 많았지만 방송에 좀 더 객관성을 유지하자는 취지에서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의 시청권 보호는 교육방송에 있어서 금과옥조와 같은 가치이기 때문에 더빙판을 계속 제작하고 있고 온라인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본방송에서 즐기실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취향을 떠나 장애인 시청자 분들에 대해서는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장애인 시청자 분들의 시청에 문제가 없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는 것은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허성호 CP는 <위대한 수업>을 통해 전하고 싶은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세상의 다양한 생각을 들어보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시대에 같이 숨 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어떤 분야를 가장 열심히 연구했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이 사람이 왜 인정을 받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세상의 다양한 생각을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송을 만들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들, 양 극단으로 치닫는 여러 사안들도 조금씩은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하면서도 거창한 생각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