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공사관으로 피신, 가족은 멸문지화
[김삼웅 기자]
▲ 김옥균의 모습 1851년생인 김옥균은 21살 때인 1872년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인간 관계가 폭 넓었고 다재다능했다. 뛰어난 재능과 함께 인간적인 약점도 많았던 그는, 신복룡 교수의 평가처럼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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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어릴 때에 지었다는 "달은 비록 작지만 온천하를 비춘다"는 원대한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이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역적'이란 죄명이 붙고 더 이상 국내에서는 생존이 어려워 일본으로 피신하고자 했다. 망명객의 신세가 된 것이다.
홍영식·박영교 등 동지 7명은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윤혁오·변수와 함께 간신히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0월 20일(양력 12월 7일) 아침부터 일본공사관 주변에 성난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낮 12시경부터 조선 군인과 일반 백성들이 합세하여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다케조에와 공사관 직원들, 공사관으로 피신한 일본인들과 김옥균 일행은 오후 2시 30분경 자국 군인들(일본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사관을 출발, 인천으로 향했다. (주석 1)
일본 공사관을 피신처로 택한 것은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서였다. "'도망자' 일행이 서대문을 지나 한강에 이르는 동안 군중들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김옥균은 어깨에, 박영효는 다리에 가벼운 총상을 입었다. 그들이 한강을 완전히 건넌 시각은 오후 5시 30분경 짧은 겨울해가 이미 서산마루를 넘어간 후였다. 이들은 이튿날 오전 7시경에야 제물포의 일본 공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석 2)
무서운 보복이 자행되었다. 위기일발로 기득권을 지키게 된 수구세력은 청국에 대해서는 새로운 '재조지은'으로 우러르면서 패퇴한 개화세력에는 가혹한 살육전을 폈다. 2023년 명색이 민주공화제의 나라에서 패자에게는 '인디언 기우제'식의 정치보복이 가해지는 터에, 갑신정변 주도세력에 대한 수구집단의 보복은 그야말로 피의 보복전이었다.
정변의 실패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독립당 요인들과 그 가족에 대하여 역적의 낙인과 함께 무서운 살육과 박해가 전개되었다. 그들의 동지 43명 중에서 김옥균 이하 9명이 겨우 망명했으며 나머지 인물들과 그들 가족의 부형이나 직계 남자들은 거의 살육당하지 않았으면, 자살하였고 여성들 중에서도 죽음이나 그와 다름없는 비참한 고난을 겪게 되었다.
척족들의 무서운 보복과 추궁이 망명한 김옥균, 박영효 등의 뒤를 따르기 10년이나 계속하였으니 국내에 처진 가족들의 참상은 형언할 길도 없었다. 그들의 가족이 가족제도상 중요한 작명의 행열자(行列字)까지 고치게 된 사실로 미루어 그 극심했던 정도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주석 3)
정권탈환에 성공한 수구파 대신들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서재필을 '5대역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체포령과 함께 '3일천하' 당시 고종의 재가를 받아 반포한 일체의 정강과 제반 조치를 무효임을 선포한 데 이어 관직이 박탈당했던 대신들을 원상복귀 또는 재임명하였다.
수구파 정부는 1884년에서 1886년까지 3년에 걸쳐 정변 관련자들에 대한 추적 끝에 대부분 체포되어 국문 및 처벌이 시작되었다. 이들에 대한 처벌 수위는 직접 관련자는 모반대역부도죄, 모반부도죄·지정불고죄가 적용되고, 관련자 부모와 형제들에게는 연좌법이 적용되었다. 김옥균 가족의 실상을 살펴본다.
김옥균 부인 유(兪)씨는 심복 하인 이점돌의 도움으로 재동에 있는 친척 유성옥 집으로 일단 피신했다가 딸을 데리고 충청도 옥천으로 도망가서 1894년 개화당의 새로운 세상이 열릴 때까지 숨어 지냈다. 그해 12월 부인 유씨는 상경하여 전동의 동생 유진근의 집에 얹혀 살았으며, 1895년 일본의 개화 문명론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보내준 김옥균 위패를 받고 죄인처럼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다. 갑오개혁 후 박영효와 충성스러운 동지 이의(윤)고의 도움과 주선으로 부인 유씨는 김영진을 양자로 맞아 생계를 꾸려갔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는 삭탈관직 당하고 대역죄로 천안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 두 달 후인 1894년 4월(양력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만 양부 김병기는 삭탈관직 당한 후 김옥균과 양자 관계를 끊고 살길을 찾았으나 나머지 삶은 순탄치 못했다. 김옥균 모친은 남편이 체포될 때 딸과 함께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김옥균의 동생 김각균은 경상도 칠곡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혀 대구 감옥에 갇힌 뒤 갑오동학농민전쟁 때 탈주, 동학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고 하나 그 뒤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주석 4)
주석
1> 안승일,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129~130쪽.
2> 앞의 책, 130쪽.
3> 이달순, 앞의 책, 219쪽.
4> 앞의 책,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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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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