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홍명보 감독과의 약속 지킨 김영권, '연봉 3배' 중동 유혹 뿌리쳤다
[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2023시즌 K리그1에서 울산 현대는 일찌감치 독주 체제를 구축했다. 대부분의 팬, 관계자는 울산이 리그 2연속 제패에 성공할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에 접어들며 팀은 대외내적인 위기를 맞았다. 선수를 포함한 일부 구성원들이 SNS에서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켰고, 단단하던 울산이라는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천과 수원에게 잇달아 패하며 홍명보 감독 취임 후 처음으로 연패를 당했다.
지난 20일 마감된 4주 간의 여름이적시장에서도 위험신호가 있었다. 핵심 미드필더로 성장한 박용우가 UAE의 알아인으로 떠났다. 약 25억원가량의 이적료를 남겼지만, 울산은 대체 선수 영입에 실패했다. 이동경과 김지현이 돌아왔지만 중원에 구멍이 생긴 울산은 박용우가 빠진 경기에서 2연패를 당했다.
여진은 이어졌다.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울산 선수들을 향한 많은 팀들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수비의 중심인 김영권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이적시장 막바지에 홍명보 감독은 김영권의 에이전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UAE의 한 클럽이 영입 제안을 보냈다는 것. 해당 클럽은 현재 선수가 울산에서 수령하는 연봉의 3배를 제시했다. 이적료도 적지 않았다.
에이전트가 구단이 아닌 홍명보 감독에게 먼저 연락한 것은 선수와의 특수 관계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김영권 본인은 홍명보 감독이 수락하지 않으면 협상 진행부터 받아들이지 않을 분위기였다. 홍명보 감독은 곧바로 선수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홍명보 감독은 이미 떠난 박용우에 이어 또 다시 전력의 큰 손실을 각오해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김영권을 만났다. 선수 생활에서 마지막으로 큰 돈을 쥘 수 있는 기회라는 걸 호소한다면 무시할 수 없었다. 김영권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홍명보 감독과 마주한 자리에서 김영권은 단숨에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되는지 진심 어린 조언을 듣고 싶어했다. 15년을 알고 지내 온 스승과 제자는 모처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홍명보 감독 역시 울산의 사령탑의 입장이 아닌, 긴 시간 동고동락한 제자이자 축구 후배를 위한 생각을 털어놨다.
홍명보 감독은 "어느 누구도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순 없을 거다. 다만 지금 하려는 선택이 선수 생활 이후 너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동으로 향하면 큰 돈은 거머쥘 수 있지만, 선수 생활의 마지막 챕터를 쓰고 있는 김영권에겐 그 이후 펼칠 축구 인생에는 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본 것.
홍명보 감독은 월드컵 3회 출전에 16강 진출을 달성하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등 이미 한국 축구의 레전드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제자가 은퇴 이후 지도자를 비롯해 축구계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 축구의 내적인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K리그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중동으로 가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봤다.
김영권 역시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고 울산으로 왔을 때의 다짐과 약속을 떠올렸다. 프로 진출 후 줄곧 중국,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한 그는 2021년 말 감바 오사카와의 계약을 마쳤다. 감바의 재계약을 포함해 많은 제안을 받았다. 그런 그가 아무 연고가 없는 울산을 택한 동기는 오직 홍명보 감독이 있어서였다. 언젠가 프로팀에서 함께 하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영권은 고민 없이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울산으로 왔고, 지난해 팀이 17년 만에 K리그 트로피를 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
울산 잔류 여부를 넘어 축구 인생에 대한 깊은 대담을 1시간 넘게 마친 뒤 김영권은 UAE로 가지 않고 울산과 함께 하겠다고 답했다. 홍명보 감독은 제자 앞에서 다 표현 못했지만 큰 고마움과 감동을 안았다. 박용우에 이어 김영권마저 떠났다면 지난 2년 반 동안 울산에서 쌓아 올린 것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었다. 홍명보 감독은 "살면서 영권이한테 빚을 지게 될 지 몰랐다. 앞으로 뭘로 갚아줘야 할 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21일 열린 K리그1 24라운드. 울산은 돌아온 이동경이 1골 1도움 맹활약을 하며 제주에 2-1로 승리, 연패에서 탈출했다. 김영권은 선발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하며 수비라인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했다. 홍명보 감독이 울산에서 치른 리그 100번째 경기에서 거둔 61번째 승리였다. 뜻 깊은 승리의 뒤에는 팀과 감독을 위한 신뢰를 지켜간 김영권의 선택이 숨어 있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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