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끄고나니 검은 가래가…" 위험천만 軍 대민지원, 또 있었다

이영근 2023. 7. 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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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폭우 피해 실종자 수색 임무도중 순직한 해병대 고(故) 채수근 상병의 안장식이 지난 22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 장병묘역에서 엄수됐다. 이날 안장식에서 채 상병의 어머니가 아들의 영정을 어루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수근이가 사랑했던 해병대에서 다시는 이같이 비통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 마련해주시길...” (해병대 소속 고(故) 채수근 상병 부모의 자필 편지)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 도중 순직한 고(故) 채수근(20) 상병의 사고를 계기로 군 대민지원 안전 규정과 지원 범위 등에 대해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채 상병은 지난 19일 오전 9시쯤 경북 예천군 내성천에서 폭우와 산사태로 실종된 주민들을 수색하던 중 급류에 휩쓸린 뒤 14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해병대 포병대대 소속인 채 상병은 구명조끼 등 안전장비 없이 작전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꼼짝 없이 죽겠구나”…위험천만 진화 작전 투입되는 군 장병들


위험천만한 현장에 투입된 군 장병은 채 상병뿐만이 아니었다. 2019년 4월 강원도 고성 산불 당시 대민지원에 차출된 해군 예비역 김모(29)씨는 군 장갑차에서 내리자마자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을 마주했다. 김씨는 “희고 노란 불길이 넘실댔다. 초록색도 있었다. 매캐한 냄새 탓에 호흡조차 힘들었는데, 알고 보니 화학 물질에 불이 옮겨 붙은 현장에 투입됐더라. 뭔가 폭발하면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해군 소방차에 올라타 정신없이 불을 끈 김씨는 60분짜리 공기호흡기를 보급받았지만 12시간 동안 이어진 작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고 기억했다. 작전을 마친 후 뱉어낸 가래침은 검은색이었다. 김씨는 “재난 상황에서 대민지원에 투입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진 않는다”면서도 “국민의 안전만큼이나 위험현장에 투입되는 군인의 안전도 함께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9년 4월 강원도 고성 산불 진압 현장에 투입된 해군 예비역 김모(29)씨가 받은 표창장. 본인 제공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방부에서 받은 ‘최근 10년간 군 대민지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군 대민지원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013년 6만5778명에 불과했던 대민지원 인원은 2022년 9월 기준 101만7146명으로 약 15배 늘었다. 대민지원의 법적 근거인 ‘재난안전법’과 ‘국방 재난관리 훈령’ 등에 따라 폭설·태풍·호우 등 자연재해뿐 아니라 코로나19 대유행 같은 사회재난 지원에도 군인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지난 2021년 재난관리 훈령을 개정해 지휘통제권을 합동참모본부로 일원화하는 등 대민지원 임무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방 재난관리 훈령은 대민지원에 투입되는 군 장병의 안전에 관해선 따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투입 범위 역시 제한하지 않는다. 해병대 예비역 주모(22)씨는 “일반 병이 간부에게 직접 안전장비를 요구하고 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면 ‘해병대 정신’ 운운하는 핀잔만 돌아오기 십상”이라며 “UDT같이 수색에 특화한 부대 외에 일반 병은 보조 업무만 수행한다는 규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재난 상황 시 주 방위군 등이 동원될 수 있지만, 군은 지원 역할만 수행한다. 박문언 한국국방연구원 국방인력연구센터장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주요 국가에서는 군이 아닌 소방 등 민간 기관이 구조나 수색 업무를 우선해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최용선 해병대 공보과장은 20일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구명조끼를 착용하는 것이 맞았다”며 “현장에서 어떤 판단을 했는지 조사를 진행 중이고, 규정과 지침을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경북 예천 폭우 피해 실종자 수색 임무도중 순직한 해병대 고(故) 채수근 상병의 안장식이 22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 장병묘역에서 엄수됐다. 이날 안장식에 참석한 채 상병의 부대장인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이 눈물을 닦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대민지원을 ‘실적 쌓기’ 기회로 여기는 일부 지휘관과 상급 부대의 인식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현역 육군 간부 B씨는 “소속 여단에서 1000명 규모의 대민지원 인원을 기한 내에 맞추지 못하면 간부와 병사의 휴가를 통제하겠다고 해 부랴부랴 인원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민지원이 국민과 군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장이 아닌 지휘관의 승진을 위한 행사쯤으로 이용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장기적으로는 간부가 주축이 된 재난대응 전문부대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2019년 군 대민지원 적정 범위 연구를 수행한 송재익 한양대 전 융합국방학과 교수(예비역 대령)는 “복무 기간이 짧은 현역병은 전문성을 기르는 데 한계가 있다”며 “부사관 이상 간부를 중심으로 재난 전문 역량을 가진 군인을 양성해 날로 커지는 재난 상황에서 군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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