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내비게이션➁] 3000년의 기다림, 잊고 있던 3가지 소원
좀 엉뚱한 이야기인데, 두어 달에 한 번 로또 복권을 사는 자신을 보며 ‘내가 동심과 멀어졌구나’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게 돈이라는 듯, 돈만 있으면 행복도 살 수 있을 것처럼 1등 당첨의 꿈을 안고 복권을 사다니…자본주의 사회가 돈으로 한정해 놓은 인간의 욕망, 그 얕은 속임수에 빠진 나를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사람의 욕망은 우주 이상으로 무한하고, 바라는바 소원도 참으로 많고 너무나 다양해서 ‘3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 지니를 만나면 ‘나는 뭘 얘기해야 하나’ 심각히 고민하며 셋으로 추리느라 애쓰던 어린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세 손가락 안에 이것을 넣었다가도 저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에 바꾸고 또 바꾸면서, 어린 나는 하나를 알았고, 하나를 얻었고, 하나를 배웠다. 여러 소원 중에 세 가지를 고르면서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가를 알게 됐고,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었고,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과정임을 배웠다. 어른의 말로 정리한 것일 뿐 어린 마음에도 생각은 선명했다.
그러한 생각들을 마음의 주춧돌 삼아 숱한 선택의 순간들에 기준점으로 적용해 살아오면서도, 먹고사는 일의 엄중함에 핑계 대고 ‘지니’ ‘3가지 소원’이라는 단어와 표현 자체를 뇌의 표면에서 밀어두고 있다가. 최근 생각지도 못하게 ‘정면으로’ 마주쳤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을 통해서다.
줄거리에 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연기 잘하는 틸다 스윈튼이 나오고 눈빛 선한 이드리스 엘바가 나온다는 것, 유난히 하얀 여자 주인공과 흙빛의 남자 주인공이 어떤 얘기를 펼칠지 끌렸다. 게다가 아포칼립스(지구 종말, 대재앙) 이후의 세상을 배경으로 액션 쾌감의 극치를 보여준 ‘매드 맥스’ 시리즈와 앙증맞은 매력으로 행복감을 준 ‘꼬마돼지 베이브’, 개성 넘치는 펭귄들이 크나큰 웃음을 준 ‘해피 피트’, 장르도 형식도 다르나 영상과 음향에 진심인 조지 밀러 감독의 연출작이라고 하니 망설임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뭘 볼까, OTT 앱들을 유영하다가 이 정도 배우에 감독이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기대감 속에 관람을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때로는 이 느낌 이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엔드 크레딧을 만나기도 한다. ‘3000년의 기다림’은 달랐다. 영상의 화려한 색감과 미장센도 기대 이상, 웅장한 음악은 영화 전체를 휘감고,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도 과거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가장 좋았던 건 오랜만에,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외화(미국 드라마) ‘환상특급’을 손꼽아 기다릴 때처럼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이 들려주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기대와 설렘의 감정이었다. 천일야화, 천 번의 밤 동안 계속 듣고 싶을 만큼 3000년을 살아온 남자 지니(이드리스 엘바 분)의 이야기가 재미있는데. 듣노라면 지니의 사연이 가슴 아프기도 한 터라 3번으로 끝나고 지금 알리테아(틸다 스윈튼 분)를 만난 것에 안도했다.
맞다, ‘3000년의 기다림’에는 3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 지니가 나온다. 보통은 지니가 갇힌 호리병(혹은 램프)을 문지른 사람이 내놓는 세 가지 소원, 호리병에서 꺼내준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며 생기는 일들과 그 결말이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그래서 흔히 지니는 조연, 호리병을 취득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3000년의 기다림’에서 지니는 주인공이다. 현재뿐 아니라 액자소설처럼 펼쳐지는 과거 3000년 동안 벌어진 3번의 가슴 아픈 사연에서도 주인공이다. 솔로몬이 등장하는 고대 시바의 여왕 이야기로부터 오스만제국 술탄과 욕망 큰 노예 얘기를 거쳐 여자라는 이유로 시대적 한계와 싸워야 했던 중세 과학자의 슬픈 이야기를 천일야화에 빗대 3000년 3화라고 한다면, 거기에 지니는 있고 알리테아는 없다.
지니가 주인공인 것만 다른 게 아니다. 보통은 세 가지를 넘어 더 많은 소원 풀이를 원할 만큼 우연찮게 지니를 불러낸 이들은 소원을 말하기에 바쁜데, ‘3000년의 기다림’ 속 호리병 주인들은 후다닥 3가지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세 가지 소원을 이미 말했고 이미 다 들어줬다면 지니는 자신이 속한 정령의 세계로 벌써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기에 지니는 처음 호리병에 갇힌 때로부터 30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호리병 속에 갇힌 신세이고 튀르키예 이스탄불 기념품 가게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알리테아의 손에 거두어졌다.
소원을 말하지 않기로는 알리테아가 최강, 극강이다. “난 소원이 없어요”. 어린 시절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혼자 놀 만큼 혼자였던 알리테아, 고독해 보이는 그이건만 세상의 숱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서사학자다 보니 소원 풀이 이야기의 끝이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소원 말하기를 거부한다.
서사학자로서의 명성도 뛰어나고, 결혼도 했었으나 곧 이혼할 만큼 혼자인 게 익숙하고, 물질에 별 욕심 없이 살다 보니 원하는 것을 입고 원하는 것을 살 만큼의 경제 상태에 불만도 없고, 언제 어디든 갈 수 있고 머물 수 있는 자유도 좋다.
소원 앞에 입을 꼭 다문 알리테아를 보노라니 속이 탄다. 우리의 이 멋진 지니는 영영 호리병 속 신세여야 하는 거야? 그 압도적으로 큰 몸을 언제까지 호리병 속에 구겨야 하나, 그 섬세하고 자상한 감성의 사내가 긴 세월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마치 내 연인이 억울하게 당한 일인 듯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 지니가 들려주는 3가지 이야기를 듣노라면 인격적으로 훌륭한 그를 존중하게 되고, 세상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 싶게 따뜻한 마음씨에 사랑하게 된다. 이야기 속 주인공, 그의 아낌과 사랑을 받는 이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된다. 여기에 알리테아가 소원을 말하게 되는 돌파구가 있고, 지니가 드디어 3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호리병에서 해방되는 기점이 된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니가 알리테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원을 들어주는 모습에서 ‘이타적 사랑’의 끝을 목격한다. 알리테아의 세 번째 소원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공존의 해법을 볼 수 있다. 이 대목에 큰 감동이 있는데 스포일러라 말할 수 없어 입이 근질거린다. 영화를 통해 꼭 확인하시길! 3000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웨이브와 티빙, 왓챠, 넷플릭스 등에서 볼 수 있다.
단언컨대, 사랑을 아는 남자 지니, 이토록 진중하고 우아한 정령 지니는 다시 보기 어렵다. 유구한 역사 속에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고 창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전통의 계승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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