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연봉으로 대학 평가”…英 총리가 '칼' 빼든 이유

김민정 2023. 7. 23. 11:5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가 취업 성과가 낮은 학과의 모집 정원을 줄이는 등 강도 높은 대학 구조조정안을 내놨다. 졸업 후 연봉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 '자질 미달(low quality)' 학과를 솎아내겠다는 구상이다. 치솟는 등록금에도 불구하고 교육 질이 떨어지고, 좋은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학생·학부모의 불만을 반영했다.

리시 수낵(왼쪽) 영국 총리가 고강도 대학 구조 조정안을 발표한 지난 17일(현지시간) 런던의 한 학교를 찾아 학생과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영국 정부는 지난 17일(현지시간) 정부통합사이트(GOV.UK)에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부실 학과의 모집 정원을 축소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방안을 공개했다. 주된 잣대는 졸업생의 취업률과 연봉이 될 것이란 설명이다.

이에 따르면 영국 교육부 소관 이사회가 운영하는 고등교육 규제·정책 담당기관인 OFS(학생지원국)는 사상 처음으로 '미래 연봉(future salaries)'을 평가 지표에 포함한다. 영국의 모든 대학은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데, OFS의 평가 결과는 해당 대학의 정부 지원금 규모를 정하는 데 활용된다.

OFS는 대학을 평가할 때 신입생 80% 이상의 학업 유지, 75% 이상의 졸업(학위 이수), 60% 이상의 전문직 취업 또는 대학원 진학 등을 평가 지표로 활용한다. 여기에 졸업 후 연봉(소득)을 추가하는 것이다. 졸업생의 연봉이 대학·학과 평가에 도입되는 건 영국 역사상 처음이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대학개혁안 공개 전후 텔레그래프 등 영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학 가면 '괜찮은 직업'을 얻는 데 필요한 기술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 꿈'을 팔아 학위 장사를 하고 있다"며 현행 대학교육을 질타했다. 그는 "많은 학생이 이 거짓 꿈에 속아 납세자 비용(정부 재정 지원)으로 고등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도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있다"며 "'사기 학위'를 근절하고, 견습제(일과 학습을 병행하는 직업교육)를 활성화해 학생들이 최상의 혜택을 얻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최종 학력, 고용 데이터 연계로 '부실 학과' 거른다


OFS와 영국 정부가 자질 미달 학과를 거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들은 개인의 학력 등 교육 데이터와 고용 데이터를 연결하는 'LEO 데이터베이스'(longitudinal educational outcomes database)를 기초 자료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LEO에서는 전공별 고용률과 졸업생 연봉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잔 랩워스 OFS 대표는 "모든 학생이 졸업 후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고품질 교육을 기대할 자격이 있다"며 "(그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OFS가 학생과 납세자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것"이라고 했다.

영국 정부는 대학들이 마구잡이로 개설한 '파운데이션(본과 시작 전 예비 과정)'도 손 볼 예정이다. 본래 파운데이션은 의학 등 특정 분야에서 학부 시작 전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훈련하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일부 대학은 경영학 등 다른 분야에도 파운데이션을 개설했다. 이를 두고 대학 수입을 늘리기 위한 방편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영국 정부는 파운데이션 학비를 종전 9250파운드(1518만원)에서 5760파운드(945만원)로 낮추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다만 영국 정부가 마련한 이번 구조개혁안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LSE(런던정치경제대학교) 등 '러셀그룹'이라고 불리는 최상위 명문대엔 적용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희 디자이너


영국 정부가 이처럼 '칼'을 빼 든 배경엔 현행 고등교육이 치솟는 학비에 비해 졸업생의 취업 등은 부진하다는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 1997년까지 영국 대학에 다니는 자국 학생의 등록금은 '0원'이었다. 이후 노동당 소속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 재정 낭비를 막고 대학 경쟁력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대학 등록금이 도입됐다.

영국 대학의 등록금(상한액)은 2006~2011년 3000파운드(약 492만원), 2012~2016년 9000파운드(1477만원), 2017~2023년 9250파운드(1518만원)로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영국 싱크탱크인 재정연구소(IFS)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대학 졸업생은 평균 4만5000파운드(7388만원)의 부채를 안고 졸업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학생의 학비·생활비 부담은 커졌지만, 졸업 후 고연봉의 일자리를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영국 채용 웹사이트가 지난해 구직자들의 이력서를 분석한 결과 명문대(러셀그룹) 졸업생이 졸업 후 5년 정도가 지나야 연봉 3만 파운드(약 4925만원)에 도달했다. 영국 대졸자 초임 평균은 2만4291파운드(3988만원) 정도다. IFS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영국 대학 졸업생 다섯 중 한 명은 "대학을 가지 않는 게 재정적으로 더 나았을 것"이라 답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지난 17일(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에 "많은 학생이 대학 교육을 받고도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사기 학위' 를 근절하고, 견습제(일과 학습을 병행하는 직업교육)를 활성화해 학생들이 최상의 혜택을 얻게 할 것"이라는 등의 메시지를 남겼다. 사진 리시 수낵 영국 총리 트위터 캡처


중앙포토

브렉시트로 유학생 감소…. 대학 재정난에 '교육 질' 불만


영국은 2010년 이후부터 보수당 정부의 시장화 정책에 따라 대학 지원 규모를 줄이고 있다. 10년 전 150억 파운드(24조원)에 달하던 지원금이 현재 47억 파운드(7조700억원)로 줄었다. 이에 대학들은 주로 등록금을 올려 줄어든 수입을 메꾸려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인플레이션으로 에너지 요금, 교직원 급여를 포함한 운영 비용이 늘고 있다"며 "학비는 올랐지만 교육의 질은 그에 상응해 향상되지 않고 (수업료의) 실질 가치를 잠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도 영국 대학을 힘들게 한 원인 중 하나다. 브렉시트 이전에는 EU 학생의 유입이 많았다. 자국 학생보다 2배 이상 등록금을 내는 해외 유학생이 영국 대학의 재정엔 상당한 도움을 줬다. 하지만 브렉시트에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해외 유학생마저 대폭 줄었다.


흔들리는 수낵 정부, '인플레이션 잡기' 총력

영국 내에선 수낵 총리가 내놓은 개혁안에 비판도 만만치 않다. 대학 교육의 질을 취업률과 연봉을 잣대로 평가할 수 있냐는 반발이 나온다. 졸업 후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학위'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비판이다. 취업에 유리한 순으로 학문을 서열화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또한 보수당 정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영국 대학 학비는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 이후 보수당이 집권한 동안 약 3배가량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낵 총리는 개혁안을 밀어붙일 모양새다. 현재 영국은 생활비가 급등하는 가운데 보수당의 지지율이 노동당에 뒤지고 있어 수낵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한 상황이다. 수낵 정부는 올 연말까지 인플레이션을 절반까지 낮추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때문에 부실한 대학교육을 비판하는 한편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이 정당한 급여를 받고 경제 부흥을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김민정 기자 kim.minjeong4@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