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회사 삿포로 향한 맹비난... 미국인들이 화난 이유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 지난 13일 자 <뉴욕타임스> 기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 앵커 브루잉이 127년 만에 문을 닫다" |
ⓒ 뉴욕타임스 |
1896년 캘리포니아에 설립되어 127년의 역사를 가진 앵커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금을 캐러 온 노동자를 위한 맥주, 스팀비어(Steam beer)를 여전히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크래프트 맥주를 탄생하게 한 대부이기 때문이다. 찬란했던 골드러시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미국 양조장이기도 하다.
▲ 골드 러시 초기에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배 |
ⓒ 위키피디아 |
앵커는 골드러시 시절 독일 이민자 출신 괴틀립이 만든 양조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는 냉장 시설이 없었던 시절이라, 양조사들은 뜨거운 맥즙을 지붕 위에 올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식히곤 했다. 이때 자연스럽게 발생한 수증기 때문에 맥주에 스팀비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역 맥아와 홉의 섬세한 향과 깔끔한 목 넘김으로 금광 노동자의 목을 축여주던 저렴한 맥주였다.
이 맥주에서 흥미로운 건 효모다. 보통 섭씨 10~14도 정도에서 발효하는 라거 효모를 상온에서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독일에서 가져온 라거 효모를 냉장 시설 없었던 환경에서 어떻게든 사용해 보려 했던 흔적이다. 현대 맥주에서 캘리포니아 커먼(California common)이라는 스타일로 분류되는 스팀비어는 지금도 이 정체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골드러시 흔적 남아있는 유일한 양조장
1849년 스팀비어를 양조하던 괴틀립은 1871년 오래된 양조장을 구입해 골든 시티 브루어리를 오픈했다. 1896년 또 다른 독일 출신 양조사 어니스트 F. 바루스는 적자에 허덕이던 이 양조장을 인수한 후, 앵커라고 이름을 변경했다. 이름을 앵커, 즉 '닻'이라고 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샌프란시스코 항구의 강건한 모습을 담아내려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한때 100여 곳이 넘던 스팀비어 양조장은 19세기 후반 이후 앵커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앵커로서는 대세를 따르지 않는 행보였다. 1860년부터 미국 맥주는 옥수수와 쌀이 들어간 황금색 라거가 주류가 된다. 1829년 설립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잉링을 비롯해, 슐리츠, 밀러, 안호이저-부쉬 등 내놓으라 하는 양조장들이 대중이 좋아하는 밝고 가벼운 아메리칸 라거를 생산하며 크게 성장했다.
아이러니하게 스팀비어라는 정체성이 앵커를 생존할 수 있게 한 무기가 됐다. 비록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1919년부터 14년간 미 대륙을 강타한 금주령에도 앵커는 살아남았다. 맥주 속에 담겨있는 캘리포니아 역사가 지속적인 관심의 원천이었다.
▲ 1971년 프리츠 메이택과 크루들 |
ⓒ 앵커 브루잉 컴퍼니 |
이듬해 메이텍은 양조 기술을 습득하고 영국과 독일 양조장을 탐방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는다. 앵커는 비로소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새로운 리더의 등장으로 낡은 장비는 교체되었고 양조 철학도 새로 정립됐다. 여전히 스팀비어는 손님들의 테이블로 서빙되었지만, 메이텍은 자신의 양조장에서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젊은 메이텍에게 버드와이저와 밀러 같은 대중 라거는 낡은 기득권 맥주였다. 옛 질서를 거부하는 히피 정신에 맞는 맥주가 필요했다. 그가 떠올린 맥주는 황금색 라거에 밀려 사라진 영국 맥주들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진보적인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지속된 투자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개척자 정신으로 극복해 나아갔다.
▲ 1974년 프리츠 메이텍이 출시한 앵커 포터. 한국에서도 마실 수 있었다. |
ⓒ 윤한샘 |
혁신은 멈추지 않았다. 향신료를 넣은 크리스마스 에일과 아메리칸 발리 와인의 시초, 올드 포그혼이 잇달아 세상에 나왔고 1984년에는 금주령 이후 첫 밀 맥주도 생산했다. 이 모든 맥주는 크래프트 맥주의 효시가 되어 1980년 이후 시에라 네바다 페일에일을 비롯해 혁신을 꿈꾸는 소규모 맥주 양조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더욱 대단한 건, 새로운 맥주가 나오는 중에도 스팀비어는 계속 양조되었다는 것이다. 혁신과 전통을 함께 지키는 가운데 묵묵히 크래프트 맥주 운동을 이끄는 모습은 앵커만의 유일무이한 가치였다.
2010년 프리츠 메이텍은 은퇴를 선언하며 앵커를 캘리포니아 소재 그리핀 그룹에 매각했다. 메이텍은 스피릿에서 맥주로 산업 확장을 노리던 그리핀이 앵커의 철학을 이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크래프트 맥주의 성장을 눈여겨보던 대기업 맥주들이 크래프트 맥주를 가만두지 않았다.
2011년 시카고 대표 크래프트 양조장 구스 아일랜드가 에이브이 인베브에 합병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몰슨 쿠어스가 블루문을, 2017년 하이네켄이 라구나티스 등, 굵직굵직한 크래프트 맥주들을 인수했다. 일본을 벗어나 미국 시장 확대를 노리던 삿포로도 이 흐름에 동참했다.
삿포로는 미국 맥주 브랜드가 필요했다. 앵커를 통해 자사 브랜드를 알리고, 미국 땅에서 아사히를 견제할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많은 사람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지분만 변경될 뿐, 맥주 생산 방법과 철학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며 안정적인 투자를 약속했다. 곧 자금이 필요했던 그리핀과 금전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앵커의 인수는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사실 지난 십여 년간 일본 맥주의 해외 브랜드 인수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아사히는 2017년 체코 필스너 우르켈과 2019년 영국 풀러스를 품으며 세계적인 맥주 회사로 떠올랐다. 수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 각 브랜드의 정체성과 철학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아마 삿포로에도 유사한 동행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 아메리카 발리와이의 시초, 올드 포그혼. 이제 더 이상 이 맥주를 마실 수 없는 건, 커다란 슬픔이다. |
ⓒ 윤한샘 |
2021년 로고 리브랜딩은 앵커 지지자들의 결정적인 반감을 불러오기도 했다. 정체성이 사라진 로고가 박힌 캔에 담긴 앵커 맥주는 누가 봐도 어색했다. 골드러시를 상징하는 스팀비어와 크래프트 맥주의 토대가 된 리버티 에일의 아우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삿포로는 앵커의 가치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앵커는 높은 수익을 보장해 주는 브랜드가 아니다. 3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400억 원의 매출은 미국 시장에서 크지 않지만, 그 안에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숨어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꾸준히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데 투자했다면 삿포로는 놀라운 팬덤과 업계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삿포로라는 브랜드로 자연스럽게 전이됐을 것이다.
삿포로는 앵커의 폐쇄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영향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오히려 팬데믹이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것 아니었을까? 앵커 직원들의 반발과 매출 하락은 삿포로에 떼고 싶은 혹이었을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삿포로는 인수 6년 만에 재매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전통과 크래프트라는 양 날개를 가진 앵커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 주는 행태다.
프리츠 메이텍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가늠조차 안 된다. 앵커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있는 펍과 바 관계자와 맥주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큰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시에라 네바다 설립자 켄 그로스맨은 지역지 <에스에프게이트>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나에게 큰 영감의 원천이었던 앵커가 문을 닫는다는 것에 큰 슬픔을 느낀다'고 전했다. 스팀비어에 매료되어 크래프트 맥주 업계에 발을 디딘 브루클린 브루어리의 헤드 브루어 개릿 올리버 또한 '앵커는 크래프트 맥주의 대부였다'며 '큰 상실감과 슬픔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비슷한 일이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있었다. 1980년부터 을지로를 지켜왔던 맥주 노포, 오비베어다. 철거 명령으로 을지로에서 쫓겨난 오비베어는 다행히 수많은 응원과 지지 덕에 홍대에서 재오픈할 수 있었다. 위치만 바뀌었을 뿐 그곳에는 을지 오비베어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초창기 간판과 파란색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
브랜드를 떠나 이것이 맥주가 가지는 문화적인 힘이다. 오비베어처럼 앵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지구 반대편에서 보내는 작은 응원이 나비 효과가 되길, 내가 마신 앵커 리버티 에일과 올드 포그혼이 마지막이 아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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