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모르는 이들이 정치하면 망한다"고 한 김대중
[장신기 기자]
▲ 1983년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중 '민주회복'을 외치며 워싱턴D.C.에서 집회하고 있는 모습. |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김대중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국내에선 정당과 재야사회운동 세력 양쪽 모두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국제적으로는 해외 한인민주화운동 세력과 외국의 양심적인 정치인, 지식인까지 포괄하는 국제연대활동까지 전개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이행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이 모두 밝혀진 상태는 아니며 제대로 된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그중에서도 민주주의 이론가, 민주화운동 전략가로서의 그의 면모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김대중은 대중동원뿐만 아니라 이념과 담론 투쟁 영역에서도 중대한 역할을 했다.
김대중은 개발독재론을 비판하면서 한국과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의의를 강조했으며 국민민주혁명, 3비노선(비반미·비폭력·비용공), 자주적 민주화론 등 다양한 전략을 제시했다. 그는 이와 같은 내용을 기고문, 메모, 일기, 저서 등 수많은 텍스트 자료를 통해 남겼다. 그런데 관련 내용이 인터뷰나 연설 등 음성 및 동영상 자료로 공개된 적이 거의 없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85년 2월, 김대중의 목숨을 건 귀국
▲ "우리 국민은 절대 전두환 정권을 용납하지 않을 것" [1985년 1월 연설 영상]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먼저 이 연설의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내란음모사건으로 1980년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은 감형돼 수감생활을 이어가다 1982년 12월 23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됨과 동시에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때부터 김대중의 2차 미국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망명투쟁을 이어가던 김대중은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귀국하기로 했다. 이는 총선에서 야당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김대중의 신변 안전을 우려하는 여론이 크게 형성됐다. 1983년 8월 21일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아키노가 귀국 도중 마닐라공항에서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김대중의 결단에 대해 '목숨을 건 귀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재미교포들은 대도시별로 김대중의 안전귀국을 위한 각종 환송행사를 개최해 미국 내 여론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1985년 1월 19일 미국 LA에서도 환송행사가 열렸고 김대중은 이 자리에서 80분동안 연설을 했다. 이번에 공개한 자료가 바로 이 행사에서 한 연설이다.
▲ "한국 국민은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1985년 1월 연설 영상]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군사독재 정권이 길어지면서 나타난 부정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민주화에 대한 패배주의와 회의주의였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한국은 원래 민주주의를 할 수 없는 나라이고 개발독재론이 한국의 현실에 맞다는 사고가 유포되고 있었다.
특히 당시 민주주의는 주로 서구 선진국가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견해는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처럼 퍼지고 있었다. 김대중은 이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한국 국민들이 패배주의적인 역사관, 민족적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국 국민은 잡초같은 국민이에요. 바람이 불면 넘어지지만, 바람은 계속 불 수가 없어요. 결국 바람은 멈추고 잡초는 다시 일어나요. 한국 국민은 잡초 같기 때문에 무거운 발로 밟으면 고개 숙이지만, 그 발이 지나면 도로 일어나요. 이것이 한반도의 6000만이 오늘날, 남아서 세계 몇 대의 국민이 남아 있는 비결이에요."
그러면서 김대중은 한국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고 민주주의 전통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서구사회에서 그 제도를 발명한 것뿐이지, 자유와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바라는 어느 장소에나 민주주의 원리가 있는 거예요. 한국에도 민주주의 자유 요소가 역사적으로 너무도 많아요.
우리는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단군 신화 자체가 홍익인간, 백성을 크게 이롭게 한다는 거예요, 춘향전을 보세요. 춘향전이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만이 아니라, 여권을 주장하고. 이러한 것이 우리 민중 속에서 나온 생각이에요."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 다양성 모르는 세력이 정치하면 "망한다"고 한 김대중 [1985년 1월 연설 영상]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반공과 민주주의는 한국의 국가적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군사독재 정권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진 못했다. 그래서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신들의 정치가 '특정 민주주의'라는 식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대중은 "군사독재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군인들이 정치하면 민주주의란 말이 되지 않아요. 군인들은 다양성을 몰라요. 우리는 정치적 라이벌은, 너도 살고 나도 다르다는 것도 생각하지만, 군대는 사람 싸우는데 너도 살고 나도 살자 할 수 없어요. 너 살고 내가 죽어야 해요. 그러기 때문에 군인이 정치하면 라이벌은 적으로 본단 말이야. 에너미(enemy)로 본단 말이야. 민주주의가 되지 않아요."
김대중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 상대를 적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태도 등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군사독재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설명한 것이다.
김대중은 일제강점기, 전쟁과 분단고착화, 군사독재정권 등 극단적인 시기를 살아왔음에도 화해·통합·관용의 정치를 강조하고 이것을 몸소 실천했다. 이것은 김대중이 철저한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대중은 위에 언급한 내용 외에도 다양한 주제에 걸쳐서 의미있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이 자료는 동영상 자료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1970년대까지 남아 있는 김대중의 주요 연설은 모두 음성자료다.
1970년대에도 김대중의 동영상 자료가 남아 있긴 하지만, 자료화면 차원에서 일부 모습을 촬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김대중의 연설을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때는 1980년대부터이며 2차 미국 망명 시기에 주로 제작됐다. 이때는 김대중이 50대 후반에서 환갑으로 접어들 시기인데, 그의 연설을 들어보면 1970년대(김대중의 나이 40대 중후반과 50대 초중반)와 비슷할 정도로 열정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 전체 영상 자료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바로가기 URL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FtMlK991wKmcwpKVv1N9z9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거리로 나온 교사들 "우리가 원하는 건 낡아빠진 옛날 교권 아니다"
-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침해?... 통계는 '관계 없음'
- 한국 대학원생이 일본 경찰서장에게 머리 숙인 까닭
- 일본으로 간 엄마부대, 기시다 관저 앞 민망한 시위
- 실업급여 170만원 받습니다... 망설이다 주문한 이것
- 오히려 고등학생이 읽으면 좋을 책 '마흔에게'
- 걸으세요, 읽으세요, 홀로 고요하세요
- 블링컨 "월북 미군 우려... 정보 얻으려 북한에 연락"
- 주한대만대표부 "수상한 소포, 중국서 최초 발송돼 대만 경유"
- 끝내 보내야만 했다… 수색 중 순직 채수근 상병 눈물의 영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