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분석과 평가

김삼웅 2023. 7. 2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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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 21] "김옥균은 한국정치사에 있어 과도기의 인물이었다"

[김삼웅 기자]

▲ 갑신정변 전에 찍은 개화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국사편찬위원회
 
갑신정변은 개화파의 정치적 쿠데타였다.

국정개혁의 현실적 방법이 없어서 택한 변칙이었다. 청국에 대한 종속관계를 청산하고자 일본이라는 새로운 외세를 동원한 것은 지극히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1884년 12월 우정국 개국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이 즉각 개입함으로써 '비상한 공을 남김 없이'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에서 청국에 밀리던 일본. 그리고 청국과 민씨척족에 의해 정계에서 소외되어가던 김옥균 일파의 합작인 정변이었지만 청국군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일본의 지원을 과대평가해 광범한 지지 세력도 없이 졸속으로 일으킨 정변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 3일천하의 일반적 평가이다. (주석 28)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중국의 양무개혁이라는 국제적 변혁기에 조선에서도 선구적 개화파 청년들이 국정개혁에 나섰다가 좌절되고, 국정은 더 깊은 반동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개혁의 불씨는 살아남아서 향후 동학혁명·독립협회·만민공동회·갑오개혁 등의 핵심가치로 작동하였다. 

개화파의 정책이 특히 정치·경제정책 면에서 상당한 한계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단계적으로나마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정변은 비록 부르주아계급이 주동하지는 않았으나 부르주아 정치운동적 성격을 가진 최초의 정변으로 봐야 옳다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주석 29)

북한 학계에서도 갑신정변이 비록 실패했어도 그 역사적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봉건적 반동기가 도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운동자들이 시작한 사업은 그것이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에 의거하고 인민대중의 애국적 지향을 반영한 것으로 하여 줄기차게 계승 발전되었다. 개화사상의 영향은 갑오농민전쟁 시기 농민군이 제기한 혁명적 요구들 속에 반영되고 있으며 갑오개혁, 독립협회운동, 애국문화운동 등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반봉건 반침략적 운동은 모든 개화사상과 부르주아 개혁운동의 직접적인 계승 발전으로 이룩된 역사적 운동들이었다. (주석 30)

역사적 사건 중에는 권력쟁취에는 성공했으나 남는 것이 없는 맹탕이 있는가 하면 비록 실패는 했어도 많은 유산을 남긴 경우도 없지 않았다. 갑신정변은 후자에 속한다.

갑신정변은 실패했으며, 그로 말미암은 반동과 역효과는 컸다. 단기적으로는 수구 세력의 반동을 불러와 개화 정책의 추진을 지연시켰고, 개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변의 지향과 목적, 민주 제도와 인민 평등의 가치가 일반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생득적 신분이 아닌 재능에 의해 출세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근대적 가치를 전파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변은 실패했지만, 갑신정변이 추구한 개혁의 내용과 지향성은 가깝게는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나타났고, 이후 각종 개혁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근대 변혁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주석 31)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한국정치사에서 유의미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김옥균은 한국정치사에 있어 과도기의 인물이었다. 절대주의시대가 무너지고 혁명을 거쳐 근대화로 넘어가는 역사발전의 과정 중 혁명으로 구질서를 타파하여야 하는 과도기에 나타난 것이다. 과도기(Transitional)를 S.후크교수는 위대한 시대(great times)라 했다. 다시 말해 위대한 시대란 자유와 사회조직의 일정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인류가 발전하려는 과도기적인 시대인 것이다.

이 위대한 시대는 위대한 사람을 부른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위대한 시대의 부름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이 왕의(王衣)를 입고 나타나는가는 우연이라고 했다. 그런 김옥균은 왕옷을 입고 나타나지 못했다. (주석 32) 

주석
28> 하원호, 앞의 책, 124쪽.
29> 강만길, 앞의 책, 190쪽.
30> 김희일, <갑신정변의 역사적 지위>, 앞의 책, <김옥균>, 384쪽.
31> <시대의 디자이너들>, 116쪽.
32> 이달순, <김옥균의 죽음과 국내정치>, 앞의 책, <한국 근대정치사의 쟁점>,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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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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