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걸으세요, 읽으세요, 홀로 고요하세요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김현진 기자]
많은 날을 루틴에 기대어 불안을 잠재운다. 오늘 해야 할 분량의 일을 마치고 아이와 사이좋게 하루를 보내고,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가뿐하게 밥을 먹는 하루. 그 평범함을 하찮게 여기는 대신 소중하게 끌어안는다. 오늘도 무사히 할 일을 끝냈구나, 우리 모두 무탈했구나, 마음이 쫙 펴지듯 환하게 웃었던 순간이 있었구나. 그러니까, 내일도 괜찮을 거라고 희망을 키운다.
하지만 급작스레 일이 몰려 허덕이거나, 바라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상심하는 상황도 벌어지기 마련이다. 요 며칠처럼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퍼부으면 마음에도 먹구름이 드리운다.
그럴수록 먼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당장 할 수 있는 일, 오늘까지 꼭 끝내야 하는 일에 집중한다. 가능하다면 잠시 자신을 풀어놓는다. 하루 정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만의 동굴에 머무는 시간을 만든다.
지금 내 마음이 모난 돌이구나. 함부로 휘둘러 누군가를 다치게 하느니 홀로 숨어 있는 게 낫겠구나 생각하면서. 숨어서 뾰족한 모서리를 조금 다듬어 본다. 그런 후에 가족을 돌보고 타인을 살펴도 늦지 않다.
엉클어진 기분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자기 자신이다. 마음이 울퉁불퉁하다는 걸, 표정이 젖은 수건처럼 늘어졌다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안다. 곁에 있는 이에게 물건을 건네거나 사소한 말을 하다 배어나오는 퉁명스러움으로.
타인도 그걸 알아챌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빨리 느끼는 것도 나, 마음의 이유와 형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보살피고 회복시켜 줄 사람도 자신이 아닐까.
▲ 도서관 가는 길 매번 뜻밖의 발견으로 나를 즐겁게 해주는 길 |
ⓒ 김현진 |
휴대폰이라면 방전 직전, 화분이라면 물이 모자라 바짝 마른 상태의 나에겐 충전의 시간과 촉촉하게 젖어들 감성이 필요하다. 그럴 때 필요한 처방전을 스스로에게 써준다.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홀로 머물 시간을 마련하라고, 강력 처방한다. 집을 나서서 길을 걷거나 방에 들어가 책을 읽으십시오. 영화관에 가서 어둠 속에 사라지거나 페이버릿 리스트 속 카페를 찾아가십시오, 같은.
마음이 답답할 때 습관처럼 걷는 길이 있다. 집을 나서 공원으로 이어진 샛길을 지나 동네 도서관에 이르는 길. 걸을 때마다 참 좋다고 입속으로 중얼거리게 되는 길. 공원을 가로질러 나가는 샛길엔 아까시와 모감주 등 철마다 꽃과 향기를 피어내는 나무들로 무성해 직박구리가 모여든다.
맑은 날 걸어도 좋지만 흐린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마다의 운치로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 샛길의 끝에 나타나는 육교에서는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다. 가끔 빼어나게 아름다운 노을을 보여주기도 해서 나만의 저녁 노을 스폿으로 간직하고 있다.
도서관에 다다를수록 동네의 모습이 달라진다. 대단지 아파트에서 다세대주택으로, 그리고 낮고 작은 집들로. 동네, 혹은 마을이라 부를 만한 한적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대문 앞을 화분으로 단장하거나 담벼락 위로 능소화가 늘어진 집들이 등장한다. 눈높이에 있는 창문으로 알록달록한 아이들 우산이 벽에 걸린 걸 마주하거나 열린 문 틈으로 코바늘로 뜬 가림막 모서리가 슬며시 드러나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모퉁이 작은 화단에는 청보랏빛 수국이 탐스럽게 피었고, 작은 놀이터 앞 커다란 배롱나무에는 분홍빛 꽃들이 다글다글 맺혔다.
그 길을 걷는 사이 내 마음은 다정한 기운을 얻고 즐거워진다. 그러니 매번 오늘은 또 무얼 발견할까 기대하며 구석구석 세심하게 시선을 건네게 된다. 그러느라 우울함도 잊힌다. "도서관 좀 다녀올게!" 하고 집을 나서는 손쉽고 확실한 처방전이 있어 우울한 날이 덜 무섭다.
▲ 책을 읽는 일은 고요히 내 마음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것과 비슷하다. |
ⓒ elements.envato |
집을 나설 기운조차 없거나 운 좋게 남편과 아이가 집을 비운 날에는 읽고 싶은 책을 골라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독서 모임에서 약속한 책이나 리뷰 마감이 걸린 책 말고 순전히 읽고 싶은 책으로 고르는 게 중요하다. 파삭한 감자칩을 씹듯 경쾌하게 책장이 넘어갈 책, 책을 읽는 사이 마음에 한 줄기 청신한 바람이 불게 될 그런 책 말이다.
나의 두 번째 처방전도 대체로 즉효한다. 책을 읽는 일은 고요히 내 마음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것과 비슷해서다. '구하면 이를 얻을 수 있다'(구즉득지 求則得之)는 옛 말처럼 눈과 마음은 필요한 책과 문장을 찾아낸다. 다년간의 독서 습관이 쌓인 덕일까. 책을 펼치면 언제든 내게 절실한 위로나 조언을 발견할 수 있으니.
대신 가만히 그 속으로 침잠하는 시간과 여유가 필수다. 누군가가 정확한 단어로 명료하게 생각을 꿰어낸 문장을 쫓아가다 보면 희미하던 나의 생각도 서서히 선명해진다. 집중의 순간, 몰입의 타이밍이 구하고자 하는 문장으로 나를 이끈다.
언젠가를 위해 책을 사모은다. 당장 읽지 못하면서 사버리고 마는 책들은 미래를 위한 비상약이라고 변명한다. 마음의 모서리가 뾰족해지고 표면은 울퉁불퉁할 때 책꽂이만 보아도 두어 권 꼽아낼 수 있게 준비해 두는 거라고. 언제 어디서든 작고 네모난 그것을 펼쳐 나와 책만이 아는 안전하면서 즐겁고 아름답기까지 한 세계로 도망칠 수 있도록.
책을 펼치면 가만한 시간 속에서 나를 잠재울 수 있다. 뾰족해진 모서리에서 힘이 빠지고 메마른 마음에 물기가 돈다. 방전될 것 같던 마음에 배터리가 채워진다. 다시 삶으로 돌아가 원 없이 삶을 쓰며 사랑할 수 있는 기운을 얻는다. 책 속으로 도망친 나를 잠자코 받아주는 책은 끝내 나를 북돋아 생활로 복귀시킨다.
마음이 울적한 날 나만의 처방전을 쓴다. 좋아하는 길을 걷거나 책 속으로 도망치기. 어둑한 영화관에 몸을 구겨 넣거나 커다란 창이 있는 카페에서 고요히 머물기. 엄마에게도 자신을 보살필 시간이 필요하니까. 누군가의 엄마나 아빠, 딸이나 아들이기 전에 나 자신으로 온전할 시간이.
함께 있기 위해 자신을 둥글게 다듬어 줄 기회를 만든다. 홀로 외로이 있어야 발견할 수 있는 자신을 그렇게 만난다. 내가 나를 위해 써 줄 수 있는 처방전이 많아지면 좋겠다. 당신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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