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인디그라운드(154)] 해리빅버튼의 손끝에서 탄생한 ‘듣는 영화’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텍스트만으로도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도록 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악의 분위기와 가사가 리스너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성수(보컬‧기타), 최보경(드럼), 우석제(베이스)로 구성된 밴드 해리빅버튼(HarryBigButton)의 음악이 그렇다.
특히 지난 10일 발매된 정규3집 ‘빅 피쉬’(Big Fish)는 각 트랙별로 다양한 영화들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한 ‘빅피쉬’를 비롯해 ‘티탄’ ‘더티해리’ ‘혹성탈출’ ‘델마와 루이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등 제목 자체도 영화의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데뷔 12주년 축하드려요. 최근 새 앨범 발매 기념 쇼케이스도 마치셨죠.
어느새 12주년이 되었네요. 지난 15일, 해리빅버튼의 데뷔 무대인 홍대 롤링홀에서 발매 기념 공연을 가졌습니다. 공연은 1, 2부로 구성을 해서 진행했고요. 1부는 정규 3집의 전곡을 라이브로 소개하는 쇼케이스로, 2부는 쇼타임(ShowTime)으로 팬분들에게 익숙한 해리빅버튼의 기존 곡들을 위주로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사실 밴드를 시작하고 이렇게 떨리는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마음을 다 열고 우리 안의 모든 걸 관객분들에게 숨김없이 보여주는 순간이었달까. 마치 고백을 하는 순간처럼 떨렸죠.
-이번 앨범 ‘빅피쉬’는 모든 곡을 영화를 모티브로 했어요.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더티해리’(2020)라고 볼 수 있겠죠?
네, 평소에도 영화를 즐겨 보는데 때때로 인상 깊은 장면이나 대사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받기도 해요. 음악을 만들 때면 어떤 장면 또는 공간을 상상하게 되고, 그렇게 상상 속의 공간으로 한없이 들어가면서 곡을 만들기 시작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를 모티브로 앨범 콘셉트를 잡게 되었어요.
-영화를 모티브로 한 음악이라면 장단점이 확실할 것 같아요. 음악을 들으면 그림이 그려진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고정관념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만약 음악이 아닌 글이나 영화라는 포맷으로 만들어야 했다면 원작에 대한 부담감이 분명 있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음악이었기 때문에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원작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가져가면서도 이야기는 새롭게 풀어갔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델마와 루이스’의 경우, 영화의 마지막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1966년형 썬더버드의 악셀을 힘차게 밟아 절벽으로 돌진하는데 엔딩씬은 허공에 머문 상태에서 정지화면이 되면서 끝나요. 그들이 그렇게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꼭 살려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멋대로 델마와 루이스가 절벽에서 새처럼 날아 멕시코에 갔다는 설정으로 음악이 시작되게 만들어 버렸죠. 해리빅버튼의 음악으로 찍은 ‘델마와 루이스’ 속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웃음).
-말씀하신 ‘델마와 루이스’ 외에도 ‘빅피쉬’ ‘티탄’ 등 다양한 영화들을 모티브로 했는데요, 영화를 선정한 기준도 있나요?
좋아하는 영화들도 많고 해리빅버튼의 음악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영화가 잘 매치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선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결국 작업을 시작하면서는 음악을 통해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을 따라가니 거기에 딱 맞는 영화들이 기다리고 있었죠.
-앨범명과 타이틀곡을 ‘빅피쉬’로 결정한 이유가 있을까요?
정규3집을 영화를 콘셉트로 만들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만들고 싶었던 곡 중 하나가 ‘빅피쉬’였어요. 이 곡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참 많았는데, 사적인 이야기라 망설여지기도 했고, 그런 감정을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어요. 곡이 완성되고 이 곡의 녹음을 마치고 나서야 마침내 ‘빅피쉬’가 드넓은 바다로 헤엄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제야 ‘빅피쉬’를 자신있게 앨범명과 타이틀곡으로 정할 수 있었어요.
-‘빅피쉬’의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나요?
‘빅피쉬’는 해리빅버튼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특정한 틀 안에 갇히지 않고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과 확장성을 보여드렸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기쁩니다. 그리고 ‘빅피쉬’가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모든 이들에게 작은 위안과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요.
-‘빅피쉬’를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맞아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랫동안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던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쉽지 않았어요. 그걸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어떤 면에 볼 때 매우 험난(?)했는데, 녹음을 앞두고는 며칠 전부터 잠도 못 잘 정도였어요. 이유는 이 곡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음 같은 것이 오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감정이 흘러가는대로 녹음을 마쳤어요.
-‘빅피쉬’는 물론 각 트랙별로 영화의 어떤 부분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설명해주세요.
짐 자무시 감독의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 남는다’(Only Lovers Left Alive)는 길고도 길었던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만든 곡이고, ‘티탄’은 영화를 본 직후에 악상이 떠올라 그 자리에서 손이 가는대로 만들었던 기억이 나요. ‘티탄’처럼 영화의 느낌과 스토리를 본능적으로 가져와 써 내려간 곡도 있는 반면, ‘더티 해리’처럼 영화의 캐릭터를 위주로 가져온 경우도 있습니다. ‘매드 맥스’처럼 세기말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가져온 곡도 있어서 영화에 따라 각각의 다른 부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어요.
-앨범 작업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이번 앨범 작업은 이전 작업들에 비해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었고 결과도 아주 만족스럽게 나왔어요. 특히 이번 앨범의 제작은 텀블벅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되면서 팬분들이 기꺼이 참여해 주셔서 모든 면에서 잘 진행이 되었어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후원자분들께 감사드려요.
-앨범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억나는 일화, 재미있었던 일화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빅버튼 패일리라는 오픈채팅 팬커뮤니티가 있어요. 소수정예의 든든한 써포터 분들 이신데, 한 팬 분께서 녹음하는 내내 스튜디오로 맛난 음식들을 보내주셔서 앨범 작업하는 동안 배 고플 틈이 없었어요, 감사합니다(웃음)
(석제) 성수 형이 작업을 하기 전에 반드시 영화를 봐야 한다고 해서 1968년도 개봉한 ‘혹성탈출’을 열심히 보고 왔는데, 그 버전이 아니라고 해서 다시 찾아 보는 해프닝이 있었어요. 한동안 주인공인 씨저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어요. 그리고 ‘티탄’을 보는 15분 동안은 성수 형을 원망했어요. 왜 이런 기괴한 영화를 나보고 보라고 했는지. 그런데 끝까지 보고나니 이상하게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였어요. 그래서 이 앨범의 제 최애곡도 단연코 ‘티탄’이고요.
-다양한 영화를 담은 만큼, 음악도 매우 다양한 스타일로 나왔어요.
곡마다 하고자 이야기들도, 스타일도, 감정도 각각 다르지만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성의 회복’ ‘사랑’ 그리고 ‘저항’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이 전체 앨범을 아우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앨범이 영화를 모티브로 한 콘셉트 앨범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영화가 너무 많고, 또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더 영리하게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번 앨범이 나왔기 때문에 현재로는 계획은 없지만 언제든 새로운 영화들이 추가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어느 날 익숙한 제목의 곡이 새로 나왔다 싶으면 관심 있게 봐주세요.
-이번 앨범에서의 변화들이 있다면?
드러머 최보경의 경우 해리빅버튼의 결성을 함께 시작해서 2년 정도 함께 했다가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원년 멤버로 해리빅버튼의 느낌과 그루브를 제일 잘 아는 연주자예요. 그리고 베이스를 맡고 있는 우석제는 기본기가 탄탄하고 센스있는 연주자예요. 공연이 없는 주에도 매주 두 번씩 만나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멤버들 모두 합주하는 날이 기다려진다고 할 정도로 만나면 늘 즐거워요. 즐겁게 하는 일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아요.
-앨범 아트워크 얘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아트워크 역시 앨범의 색깔들만큼 다양하고 컬러풀하더라고요.
이번 앨범의 아트워크는 메인 커버아트 외에도 각각 트랙별로 아트워크와 포스터를 제작했어요. 정규3집을 ‘듣는 영화’라고 말씀드리는데, 영화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거나 보게 되는 것이 영화 포스터가 아닐까 해요. 그래서 지난 발매 기념공연 때는 공연장 입구부터 10개의 각기 다른 포스터를 부착해서 관객들이 마치 영화관에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앨범과 관련해 듣고 싶은 평가와 들었던 평가들 중 가장 인상적인 말들이 있었나요?
해리빅버튼의 마스터링은 해외의 실력있는 마스터링 엔지니어와 작업을 하는데 최근 몇년 간 영국 메트로폴리스 마스터링의 존 데이비스(John Davis)의 손을 거쳐서 앨범이 완성되었어요. 대개 음원을 보내고나면 그걸로 끝인데, 이번 앨범의 곡들이 어메이징(Amazing) 하다라는 찬사와 함께 파일을 보내주었어요. 내심 뿌듯했죠. 무엇보다 해리빅버튼 새 앨범을 들으신 분들이 ‘마스터피스다’ ‘울컥했다’ ‘신선해요’ ‘완벽해요’ 등등 반응을 남겨주시고 있는데, 들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찬사를 다 받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해요.
-해리빅버튼의 음악은 늘 생생하고, 날 것 그대로의 사운드 때문에 즐겨 찾는 것 같아요. 이런 정통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고맙습니다! 해리빅버튼의 앨범 사운드는 국내외 어디에 내놓아도 자부할 만큼 많은 공을 들이는 부분이에요. 해리빅버튼은 첫 앨범부터 이런 밴드 또는 이런 앨범의 사운드 같은 느낌으로 갔으면 좋겠는 레퍼런스를 두지 않고 처음부터 해리빅버튼만의 사운드를 정립하자는 취지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건 정규1집부터 지금까지 10여년 간 오형석 엔지니어(타이탄 레코딩 스튜디오 대표) 덕분이죠. 매 앨범 작업할 때마다 밴드의 일원이 되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매번 최선으로 함께 해주시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이번 앨범 작업을 하면서 해리빅버튼 멤버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해리빅버튼만의 생생한 사운드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멤버들의 생각하는 해리빅버튼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보경) 해리빅버튼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밴드라고 생각해요.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이제부터는 앞으로 오래 오래 함께 나아갈 거예요!
(성수) 바위 같이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 ‘Rock at Heart!’
-벌써 12주년을 맞았는데요,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서 멤버들끼리 이야기를 나눈 것도 있는지 궁금해요.
지난 1년 동안은 기존 곡들을 다시 연습하고 신곡 작업도 병행하면서 정신없이 지나온 것 같아요. 이번에 앨범 작업을 하면서 함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죠.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전에 못했던 일들을 포함해서 더 즐겁고 더 흥미로운 일들을 많이 만들어 보려고 해요. ‘해리빅버튼과 함께라면 뭐든 즐거울거야!’라고 외치면서요.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도전들을 구상하고 계신지도 궁금해요.
한 장의 앨범 또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이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쇼(Show)’를 기획하고 무대에 올려 팬분들께 더 많은 감동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수년간 해외 무대를 통해 해리빅버튼의 음악을 세상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멈추게 되었었는데 다행히 이제는 팬데믹 상황도 지나서 기회들이 다시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유럽 투어와 미국 투어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물론 음악적으로는 끝없이 새로운 도전을 해나갈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세요!
-해리빅버튼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해리빅버튼에게 ‘최종’은 없는 것 같아요. 오래오래 더 좋은 음악을 만들고, 더 많은 세상과 만나고, 그렇게 우리의 음악을 세상 모든 사람들과 나눌 때까지 함께 ‘Keep Rocking’하는 것이 해리빅버튼이 하고 싶은 일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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