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 170만원 받습니다... 망설이다 주문한 이것 [이게 이슈]
[강다은 기자]
▲ 실업급여 개선 문제를 놓고 여야 간 공방이 이어지고 있는 17일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실업급여 신청 창구가 분주하다. |
ⓒ 연합뉴스 |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세 번째 휴식기다. 소속도 없고 수입도 없어 밤마다 캄캄한 미래를 상상하며 불안함에 눈물로 베갯잇을 적셔야 마땅할 텐데,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든다. 그건 이전의 휴식기와 다르게 *구직급여, 소위 실업급여를 받기 때문일까. 얼어붙은 취업 시장에 내던져진 주제에 일도 하지 않고 취미 생활이나 즐기면서 꼬박꼬박 실업급여까지 받는다니 너무 꿀, 아니 시럽 빠는 거 아니야?
*실업급여로 더 익숙한 '구직급여'는 실업했기 때문에 지급되는 돈이 아니다. 구직의사가 있는데도 일할 기회를 잃은, 그중에서도 다시 일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만 지급되는 돈이다.
▲ 유튜브 콘텐츠 <네고왕>을 통해 구입한 청광차단안경. 2만 7710원. |
ⓒ 강다은 |
만 오천 원이면 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비싸서 결제 버튼을 누르기까지 조금 망설였다. 막상 사니 눈도 안 시리고 좋아서 얼른 출근하고 싶어졌다. 아, 얼마 전에는 샤넬 팝업 전시에서 립글로우 샘플을 받았는데 엄마께 드렸다. 공짜로 받은 건데, 나랏돈 받아서 사치한다는 오해를 사면 안 되니까. 이 정도면 보시기에 편안한 구직급여 수급자의 태도일까?
170만 원 남짓한 구직급여는 직장 다닐 때 월 저축액과 비슷하다. 그만큼 벌었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아끼고 살았다는 소리다. 알뜰교통카드를 사용해서 교통비의 일부를 돌려받고 점심은 무조건 도시락을 싸갔다. 커피는 한 달에 한두 번 모임이 있을 때만 마셨다.
▲ 샤넬 팝업 전시에서 나눠준 파운데이션 샘플과 립글로스 샘플 |
ⓒ 강다은 |
누구도 원하지 않는 '로또 맞은 삶'
주변 지인들은 요즘 내 삶을 보고 로또 맞은 삶과 다를 게 없다고 한다. 로또 1등이 되면 하고 싶었던 일을 전부 실천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평일 낮에 치과 진료 보기, 사두고 안 읽은 벽돌 책 읽기, 관심 있는 분야 공부하기, 아크릴화 그리기 등. 다수가 선망하는 삶이 아닐 뿐이다.
매일 밤 11시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눕는다. 아득해져 오는 의식 너머로 다음날 할 일 리스트를 짧게 떠올려 보고 잠이 든다. 여섯 시에 맞춰둔 알람이 울리면 한두 번 미뤘다가 느지막이 여섯 시 반쯤 일어난다. 실업급여 폐지 논의 뉴스에 찌뿌드드한 몸과 마음을 스트레칭으로 풀며 실업급여 생활자의 하루가 시작된다.
오전에는 영어 공부를 한다. 퇴사 후 전화 영어를 시작했다. 영어를 공부해서 10년 안에 해외 미술관 투어를 떠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빨간 모자'로 불리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며 회화 패턴도 연습한다. 영어만 하면 지겨우니 구독한 시사잡지도 한 번씩 들춰본다. 구독 기간이 끝나면 연장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부 정책이 자꾸 내 뜻과는 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 억울하지만 3년 연장 구독했다.
오전은 이렇게 훌쩍 지나간다. 직장 다닐 때와 같은 시간에 점심을 챙겨 먹는다. 언제든 다시 직장에 다녀도 적응할 수 있도록 맞춰진 패턴이다. 식후에는 식곤증을 몰아내기 위해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꾸벅 졸더라도 한 시간 뒤에는 일어나서 빨래를 널어야 한다.
오후에는 도서관에 간다. 1인 가구가 에어컨을 트는 게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집에서는 영 집중이 안 되어서다. 평일 낮에도 도서관은 거의 만석이다. 졸멍쉬멍 책을 읽다 저녁을 먹고 수영장에 간다. 직장을 다닐 때도 운동은 꾸준히 해왔다. 수영하기 전엔 PT를 받기도 했고, 출근 전에 필라테스와 요가를 배우기도 했다. 아침 수영을 하고 싶었는데 자리가 안 나 결국 저녁반을 등록했다.
하루가 그렇게 저문다.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하루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던 임금 생활자의 삶에서 벗어나 오롯이 관심사에만 시간을 쏟아부으니 그렇다. 인류가 종일 노동해서 간신히 의식주를 해결하던 삶에서 벗어난 건 산업화 이후다. 구직급여는 간신히 의식주를 해결해 준다. 전통적 가치로 보면 삶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고, 현대적 가치로 보면 기본적 욕구만 충족시켜 주는 셈이다.
▲ 미술 수업을 들으며 그린 다비드 자맹의 그림 모작. |
ⓒ 강다은 |
다시 취업하면 몇 년을 쉼 없이 일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구직급여가 나오는 단 몇달 간은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다가올 10년을 내다봤을 때 가장 큰 갈증을 느낀 부분에 시간을 쏟는 중이다. 그게 나에게는 운동과 취미생활이다.
마지막 직장은 퇴사 6개월 전부터 급여가 밀렸다. 급여일이 지나 100만 원이 입금되고 다음 달 급여일이 다가올 때쯤 남은 급여가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자, 그마저도 들어오지 않았다. 고용보험도 연체되어 있었다. 모아둔 비상금으로 생활비를 메우기 버거울 지경에 이르러 권고사직으로 구직급여를 받게 됐다. 밀린 급여와 연말정산, 퇴직금은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아직도 알 수 없다.
퇴사 후 바로 면접을 봤다. 현재 급여보다 세후 월 100만 원을 더 주겠다고 했다. 연봉으로 1200만 원 이상이 오르는 셈이다. 단, 연차가 없었다. 일이 생기면 허락을 구하고 조기 퇴근을 할 수 있다지만 아마 당장 병원에 갈 만큼 아프지 않고서야 용산 IMAX에서 영화를 보겠다고 쉬기는 힘들 거다. 작년까지는 토요일도 출근했는데, 올해부터 주 5일로 바뀌었다는 설명을 듣고 출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구직급여가 아니라면 바로 출근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겠지. 그 직장을 몇 달이나 다녔을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복지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를 돌보며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원한다. 그래야 오래 일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구직급여는 취업할 의사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탐색할 시간을 벌어주는 셈이다.
직장을 잃었다고 해서 지인들이 결혼식을 미루는 것도, 돌아가실 분이 좀 더 오래 사시는 것도, 태어날 조카가 몇 달 더 엄마 배에서 머무는 것도 아니다. 일상을 유지한다는 건,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떠나서 나를 둘러싼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삶은 정말 사소한 것들로 가득하고 지루하며, 말도 안 되게 허무한 이유로 허물어진다. 그러니까 구직급여는 퇴사한 직장인들이 얌체처럼 빼먹는 돈이 아니라, 노동 의지는 있으나 일터가 없는 사람을 통해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 돈이다.
돈이 도는 과정에서 실업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도와준다. 애초에 구직급여의 목적이 그렇지 않은가? 악용하는 일부 사례를 전체인 양 떠벌리고 결국 구직급여 제도를 폐지해서, 그렇게 아낀 돈이 향하는 곳은 결국 어디인가. 어떤 사회를 만드는 데 쓰려는 건가. 만들고 싶은 국가라는 게 있긴 한가.
그럼에도 이력서를 낸다
채용 공고만 보고도 내게 맞는 직장을 선별하는 눈이 생기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슬프게도 대부분 노동의 맛은 먹어봐야(겪어봐야) 알 수 있다.
퇴사 후 갖는 휴지기는 버린 미각을 되찾기 위해 잠시 입을 헹구는 시간이다. 그 과정에서 샤넬 선글라스를 쓰든 70% 할인하는 청광차단안경을 쓰든 해외여행을 가든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그 삶을 지속할 의지다. 맥락은 문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삶에도 존재하고, 어떤 재화나 경험의 가치는 당사자의 삶의 맥락에서 파악할 일이다. 내 삶의 맥락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는 스스로가 선택할 일이지 타인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분노하지만 오늘도 이력서를 내고, 내일은 면접을 봐야지. 부지런히 면접 봐서 일을 구하고, 근로해서 4대보험을 내야 은퇴하고 쥐꼬리만 한 연금이라도 받겠지. 역사를 통해 배운 건, 어떤 시대나 권력도 결국은 지나간다는 거다. 거센 파고 속에서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는 게 먼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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