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밀란 쿤데라의 고백 "나는 이렇게 공산주의에 매혹되었다”
"공산주의, 새로운 세계 약속했으나 공포통치"
그가 아니었으면 어찌 체코 제2의 도시 브르노(Brno)를 찾아갈 생각을 하겠는가. 아무리 세계적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브르노에 태를 묻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의 치명적인 문장에 매료되지 않았으면 어찌 브르노에서 유전의 법칙을 발견한 멘델 수도사의 집을 가보고, 세계문화유산인 투겐다트 빌라를 가보았겠는가.
지난주 밀란 쿤데라(1929~2023)의 부음을 이른 아침 아들이 카톡으로 알려주었을 때 자동반사적으로 브르노가 떠올랐다. 쿤데라가 아니었으면 여행하기 힘들었을 도시 브르노에 관한 기억의 편린들이 앨범을 넘기듯 스르르 펼쳐졌다.
거의 모든 미디어에서 그의 발자취 기사를 비중 있게 쏟아냈다. 신문들은 모두 문화면 한 면을 털어 그의 문학과 삶을 보도했다. 그런데 읽고 나니 아쉬움이 컸다. 수박 겉핥기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면의 제약 때문인가.
나의 ‘밀란 쿤데라 연구’는 브르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프라하로 올라와 시내를 종횡으로 훑었다. 그의 단골식당을 찾아갔고, 그를 ‘친절한 이웃집 남자’로 기억하는 중년 여인을 찾아내 인터뷰까지 했다.
1948년 2월 25일, 체코 공산 쿠데타 성공 선언
밀란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연구가였다. 아버지는 음악적 재능을 보인 아들을 음악가로 키울 요량으로 피아노를 가르쳤고, 음악 교사에 보내 작곡을 배우게 했다. 밀란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거치며 음악에만 빠지지 않았다. 시를 쓰기도 했고 예술 전반에 관심을 보였다. 브르노 음악학교(YAMU) 졸업을 앞둔 그는 고민할 것 없이 수도 프라하를 선택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이었기 때문에. 이는 부산 출신이 서울로 대학을 가는 것과 흡사하다.
사람의 생애에는 시대적 환경이 수목의 나이테처럼 박힌다. 밀란이 프라하로 상경한 시점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프라하 카를대학에 합격한 게 1948년 1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좌우합작 정권이 탄생했다. (이 무렵 세계 여러 나라에서 좌우합작 정권이 들어섰다) 스탈린의 꼭두각시 클레멘트 고트발트는 좌우합작 정권 2년여 동안 협박과 테러와 살인으로 정부 내에서 우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음모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1948년 2월 25일 오전, 프라하에는 싸락눈이 흩뿌렸다. 쌀쌀한 영하의 날씨에도 구시가 광장은 몰려든 군중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밀란도 광장 한쪽 귀퉁이에서 골즈킨스키 궁전을 바라보았다. 궁전 발코니에 등장한 고트발트는 공산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선언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인민은 이제 완전히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것이다.” 군중이 환호했다. 광장이 들썩거렸다. 열아홉 청년은 그렇게 야만의 시대에 던져졌다. 며칠 뒤 그는 체코 공산당에 입당원서를 썼다.
밀란은 카를대학 신입생이면서 신입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공산당 지도자 고트발트를 찬미하는 시를 썼다. 밀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술가와 음악가들 대부분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라 고트발트와 스탈린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작품을 만들었다. 블타바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거대한 스탈린 동상이 세워진 것도 이즈음이었다.
1950년 밀란은 공산당에서 쫓겨난다. 공산당원들은 그의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성향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1956년 공산당에 재입당했지만, 또다시 출당과 재입당이 반복된다.
국립예술대학 영화학교(FAMU) 교수가 된 밀란은 세계문학과 시나리오를 가르치며 에세이와 희곡을 썼다. 시작(詩作)으로 출발해 평론과 희곡을 주유한 그는 최종적으로 소설에 닻을 내렸다. 1967년 출간한 장편소설 ‘농담’을 발표하면서 명성이 체코를 넘어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이 시절 소설가 밀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나로드니 가 8번지 식당 ‘클라슈테르니 비나르나’. 우리말로 번역하면 ‘수도원 와인 레스토랑’. 작가동맹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있어 작가들이 즐겨 찾았다. 출입문도 작아 얼핏 지나치기 쉬운 이곳을 작가들이 애용한 이유는 음식값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버섯감자튀김을 시켜놓고 필센 맥주를 마시며 잠시라도 암울한 현실을 잊곤 했다. 그는 공산당 출당과 재입당을 반복하면서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은 피했다. 이것은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칼날 위에 선 채로 살아남은 것과 흡사하다. 밀란은 하나의 답(答)만을 강요하는 공산 체제에서 작가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1968년 4월, 프라하의 봄
공산 치하 20년째인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왔다. ‘프라하의 봄’이다. 공산당 제1서기 둡체크는 1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공산 통제를 완화하는 개혁?자유화 강령을 밝혔다. 종교?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사회 모든 부문에서 자유화 바람이 불어닥쳤다. 급기야 체코 국민은 공산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 등과 함께 민주적 개혁운동을 주장한 지도자 그룹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 무렵 ‘농담’의 프랑스어판 발간에 맞춰 파리를 방문하기도 했다. 잠깐이지만 파리에서 자유의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소련은 체코 사태를 불안하게 주시했다. 프라하에서 부는 바람이 국경 넘어 다른 공산권 국가에도 확산한다면…. 소련은 8월 21일 무력으로 자유화 운동을 진압했다. 소련제 탱크의 캐터필러 아래 프라하의 봄은 삽시간에 겨울로 얼어붙었다.
이후 보헤미아 평원은 거대한 실험실로 바뀌었다. ‘질서의 원상복구’라는 이름 아래 기이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밀란은 하루아침에 영화학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대신 그에겐 재즈클럽 종업원 자리가 배당되었다.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훗날 대통령 역임)에게 맥주 공장에서 맥주통 굴리는 일이 주어졌다.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 외과의사 토마쉬는 병원에서 쫓겨나 유리창 닦이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민주화 운동에 동조한 50만명 이상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12만명은 이웃 나라로 이민을 해야 했다.
탄압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이 서점과 도서관에서 일제히 사라졌다. 작가에게 사형선고였다. 스무살 언저리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시까지 썼던 밀란이 아니었던가.
1969년 1월, 묘지의 평화 속에 숨죽여 있던 프라하에 ‘쨍’ 하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를대학 철학부 학생 얀 팔라흐가 바츨라프 광장에 나타났다. 역사의 한복판에 등장한 얀 팔라흐. 그는 소련의 침공에 저항한다는 뜻으로 분신을 했다. 몇걸음 걸어가다 쓰러졌다.
체코가 자유화된 지 34년째. 전체주의 악몽을 경험한 체코는 1999년 일찌감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지금 체코에서 전체주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중심가에 공산주의 박물관이 있고, 스탈린 흉상을 비롯한 공산주의 상징과 기호들이 전시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페트진 공원과 바츨라프 광장에 가야만 감시와 통제와 폭력으로 점철된 공산주의 실상을 조금 느낄 수 있다. 야트막한 산 중턱에 조성된 조각작품 제목은 ‘전체주의 폭정’이다. 계단에 숫자가 쓰여있다. 4500, 205486, 248, 327, 170938. 1948년부터 1989년까지 41년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유형별 숫자다. 4500은 감옥에서 숨진 사람, 205486은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 248은 추방된 사람, 327은 국경을 넘다 총살된 사람, 170938은 국외로 이민을 떠난 사람.
얀 팔라흐가 분신한 바츨라프 광장의 그 자리에는 쓰러진 십자가가 설치되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얀 팔라흐의 저항을 형상화한 것이다. 언제나 장미꽃 몇 송이가 놓여 있다.
프랑스로 망명한 밀란은 훗날 에세이 ‘작가수업’에서 자신이 젊은 날 가졌던 공산주의에 대해 생각을 솔직히 고백했다.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나를 사로잡았듯이 공산주의는 나를 매혹시켰다. 공산주의는 위대하고 기적적인 변형으로 완전히 새롭고 다른 세계를 약속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의 정권을 잡고는 공포의 통치를 시작했다. (…) 나는 광신주의와 독단주의와 정치재판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또한 권력에 도취되고, 권력에서 거부되고, 권력에 대항하다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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