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교육, 못 하는 것 보완보다는 ‘잘 하는 것’에 집중해야”

2023. 7. 22.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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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거티브에 민감한 한국문화 ① 학교
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게티이미지뱅크

피험자는 연구자의 지시에 따라 주어진 문제들을 풀기 시작한다. 문제는 두 세트로 나누어지며 각 세트마다 점수가 따로 나온다. 피험자는 한 세트에서 높은 점수를 그리고 나머지 한 세트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게 된다. 물론 시험점수는 피험자의 실제 능력과 관계없이 임의로 정해진다. 피험자가 실험실을 떠나기 전 연구자가 묻는다.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둘 중 어떤 유형의 문제지를 다시 풀어보고 싶으신가요?” 미국을 포함한 서양의 학생들은 높은 확률로 자신이 높은 점수를 받았던 문제들을 다시 풀어보고 싶어 한다. 한국이나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학생들은 정반대다. 우리 아이들은 굳이 자신이 낮은 점수를 받았던 시험에의 재도전을 원한다. 고통을 즐기는 건가.

통상적으로 서양은 이득 지향적(gain-focused) 그리고 동양은 손실 회피적(loss-focused) 문화로 분류된다. 같은 행동을 하거나 계획을 수립하더라도 서양은 그것을 통해 추가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 동양은 예상되는 손실을 최소화하는 데에 관심이 더 많다. 새로운 약을 복용하거나 운동을 시작했다면, 서양인에게 그 모티브는 원래 자신이 잘 발휘하던 기능이나 능력을 더욱 강화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반면, 같은 계획을 가진 동양인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보강하거나 개선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더 잘하도록 하는 것이, 동양에서는 자신이 ‘못하는 것을 덜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고와 행동의 초점이며 이것이 각 문화의 사회적 트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화차이의 뿌리 역시 개인의 자아실현에 초점을 둔 서양의 철학(individualism)과 공동체의 조화를 우선시하는 동양사상(collectivism)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문화 차를 참으로 여러 방면에서 목도하고 있다. 우선 교육제도를 비교해 보자. 미국에서는 월반이 매우 빈번히 이루어지며 또 그만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수학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일련의 테스트를 거쳐 수학만 상위 클래스에서 듣도록 한다. 1년을 건너뛰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학생의 능력에 따라 2년 이상 월반도 가능하다. 수학이나 과학 수업을 들으러 무거운 책가방을 무릎까지 늘어뜨린 채 근처 중학교로 걸어가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도 자주 본다. 이미 소질이 있는 과목을 더 심도 있게 공부해 학생의 탤런트를 더 날카롭게 하는 것, 다시 말해 각자가 가진 끼를 극대화하도록 돕는 것이 서양 교육의 목표다.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형평성, 공정성, 혹은 ‘위화감 조성 가능성’ 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일반 초중고에서는 월반이 미국에서만큼 쉽지 않은 듯 보인다. 더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바로 한국의 사교육 현장이다. 물론 특정 과목에 대한 아이의 소질과 재능을 심화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도 있을 것이나, 대부분은 자신이 잘 못 하는 과목에 대한 이해를 소폭이나마 향상시키기 위한 것들이다. 수학을 못 하는 아이들은 수학 학원을,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은 영어학원을 다닌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다.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려 하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길은 매번 여러 갈래로 나뉘고 그때마다 선택을 해야 한다. 디아블로에서 바바리안을 육성할 때 본래 캐릭터인 체력과 지근전에서의 전투력을 키우느냐 약점인 장거리 전투 능력이나 소환술을 보완하느냐와 유사할 것 같다. 게임을 플레이해본 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누군가는 게임 속 캐릭터 육성을 현실에서의 자기 계발과 직접 비교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태환과 마이클 펠프스는 어떤가. 어렸을 때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아 수영을 시작한 박태환 선수는 끈기와 노력으로 이를 극복해 한국의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분명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고 가정했을 때, 무언가를 극복해야 했던 사람이 그 무언가를 타고난 사람을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펠프스 역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극복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기관지와 달리 그것은 수영을 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펠프스는 키 193㎝에 발 320㎜, 그리고 윙스팬 201㎝ 등 수영을 하기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피지컬을 자랑한다. 그는 수영에 최적화된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에 맞는 운동을 그저 죽도록 열심히 한 것이다. 박태환 선수의 노력과 그 결실에 우리는 감격과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그 결실의 무게는 최소한 펠프스 선수만큼의 피땀 눈물을 흘렸을 그에게 가혹하리만큼 가볍다.

학교로 돌아가 보자. 몇 해 전 나는 당시 수험생이던 조카아이의 영어 과외를 맡았던 적이 있다. 매주 한 번씩 만나 지문 해석과 문제 풀이를 도와줬고 꽤나 많은 숙제를 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녀석의 영어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지난 시간 배웠던 단어나 해석 방법을 까먹거나 같은 유형의 문제를 반복해서 틀렸다. 물론 과외선생의 실력 탓일 수도 있으나 나는 진심의 부재에서 원인을 찾았다. 흥미도 없고 잘 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는 듯했다. 괘씸한 마음 반 측은한 마음 반으로 물었다. 그럼 하루 중 학교에서 그나마 눈곱만큼이라도 재미있는 시간은 언제냐고. 곧 답이 돌아왔다. 이 녀석에게 그런 시간이나 과목 따위는 없었다. 용케도 매일매일 지루한 시간들을 그저 참고 견디고 있었다. 조카가 참으로 가엾다는 생각, 그리고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한 약간의 분노와 함께 가장 강렬하게 내 머리를 때리는 단어는 ‘낭비’였다. 교육 예산의 낭비, 선생님들의 시간 낭비, 학부모들의 에너지 낭비, 꽃 같은 아이들 젊음의 낭비. 박살 난 부모와 아이들 간의 관계는 덤이다. 언제부터 인내와 지루함의 일상화가 교육의 목표가 되었을까. 우리는 진정 공부에 소질 있는 소수의 아이들이 더 반짝거리도록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는 건가. 나는 곧 수업을 멈추고 조카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 중 그나마 하고 있으면 시간이 제일 잘 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림 그리기, 뭐든 만들기, 그런걸 조카는 좋아했다. 일반고 3학년에서는 흔히 자습 시간으로 대체되는 미술 시간이 조카에게는 없었다. 조카는 곧 입시 미술을 시작했고 나름 이름있는 미대에 합격했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당시와 비교해 많은 것들이 변했다. 특성화고도 늘어났고, 내신이나 논술만으로도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큰 그림은 그대로다. 좋든 싫든 궁둥이 붙이고 오래 앉아 있는 놈이 끝내 결실을 본다. 끈기와 성실성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물론 의미가 있다. 조금만 더 바꿔보자. 이제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현실적으로는 ‘가장 덜 싫어하는’이 맞는 표현일게다- 영역에서 엉덩이 무게를 더 자주, 더 심도 있게 테스트해보면 어떨까. 한국의 교육은 지적 균형을 지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무엇도 아닌 어정쩡하고 둥글둥글한(well-rounded) 인간상을 추구하는 듯 보인다. 뭐든 하나를 빼어나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뭐든 섭섭하지 않을 정도는 해내는 사람들. 필자는 이러한 한국의 교육문화가 우리 아이들의 다양성을 죽여왔다고 본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수학문제를 푸는 아이, 어떤 언어든 금방 배우는 아이, 한 번 본 춤이나 연주는 그대로 복사해 내는 아이, 유튜브 채널 운영으로 돈맛 좀 본 아이. 재능은 우리 아이들의 수만큼 널려있다. 못하는 것을 조금 덜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 -수학 좋아하는 아이가 죽어라 노력해 영어를 잘 할 수는 있지만, 본래 어학에 적성이 있는 친구들의 눈에는 ‘조금 덜 못하는’ 정도가 될 뿐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재능을 연마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일면 뾰족하거나 한편 바보처럼 보여도 한 가지 좁은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을 톡톡히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더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더 생산성이 높다. 재능이 꼭 특출나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자신의 적성에 부합하는 -현실적으로 ‘가장 덜 안 맞는’- 영역에서 성실성을 겨뤄야 한다면 최소한 우리 아이들의 시간과 노력이 무의미하게 소모된다는 느낌은 덜할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된 나의 큰딸은 이제 대학 입학을 위해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음악과 미술 그리고 독서를 즐기는 내 딸. 역시 읽기와 쓰기에서는 제법 높은 점수를 받아온다. 그리기에도 소질이 있고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때도 있다. 매우 불행히도 문과생인 나를 닮아 수학은 젬병이다. 나는 오늘도 내 딸 아이와 수학 문제를 함께 풀며 꽤나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낸다. 작년 겨울 큰 맘먹고 장만한 첫 아이의 바이올린이 방 한켠에서 가엾다는 듯 우리를 쳐다본다.

김상연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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