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서 사랑받는 발레리나 이은원 “한국 무대 늘 그리워요”
“워싱턴발레단 이적은 저를 발레리나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성숙하게 만들어줬어요. 그래도 여름 휴가 기간이나마 한국에서 춤출 수 있다는 게 기뻐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거쳐 현재 미국 워싱턴발레단 주역무용수인 이은원(32)이 올여름 한국 관객과 잇따라 만나고 있다. 귀국 직후인 6월 28~29일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 20주년 공연을 시작으로 7월 19일 제20회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월드 갈라에 출연한 그는 8월엔 M발레단의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내 김아려 역을 맡아 안중근 역의 발레리노 이동훈과 호흡을 맞춘다. 미국 털사 발레단 솔리스트 이동훈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출연이다. 최근 연습에 한창인 이은원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M발레단 연습실에서 만났다.
“(이)동훈 오빠랑은 국립발레단 시절 자주 호흡을 맞췄어요. 둘 다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2018년 여름 최태지 단장님이 계시던 광주시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에 함께 출연한 인연이 있습니다. 저는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이 처음이지만 동훈 오빠랑 함께하기 때문에 좋은 호흡을 보여드릴 거라고 자신해요.”
국립발레단 부감독을 역임했던 문병남이 안무한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M발레단이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용창작산실 우수작품 제작지원 선정작으로 초연됐다. 이후 2021년 예술의전당과 함께 재제작되며 대폭 업그레이드됐다. 지난해 제12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개막작으로 선보인 데 이어 올해는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유통협력 지원사업 선정공연으로 선정됐다. 이은원은 4~5일 광명시민회관, 11~12일 마포아트센터, 25~26일 성남아트센터 무대에 설 예정이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적인 게 그리워지잖아요. 저도 미국에 간 뒤 한식이 더 좋아지는가 하면 한국 도자기나 민화 등에 관심이 생겼는데요.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도 한국 역사 소재의 창작발레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특히 문병남 선생님, 동훈 오빠와 함께 작업하니까 과거 국립발레단 시절이 많이 생각납니다.”
이은원은 지난 2016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자리를 박차고 워싱턴발레단에 입단했다. 2010년 7월 인턴 단원으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단 3개월 만에 ‘호두까기 인형’의 주역으로 캐스팅되는 등 입단 2년 만인 2012년 수석무용수로 승급할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나 그가 예원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을 졸업한 순수 국내파라는 것도 그를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단시간에 국내 최고 발레리나에 올라선 것이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늘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도 저는 너무나 빨리 주목받았어요. 그만큼 기량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워싱턴발레단의 이적 제안을 받았을 때 걱정도 됐지만 좀 더 성장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발레가 한국의 고유문화가 아닌 만큼 해외에서 활동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늘 있었고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자리 잡은 워싱턴발레단은 명문 발레단 중 하나다. 30~35명 사이의 단원 외에 15명 안팎의 스튜디오 컴퍼니와 발레학교를 함께 운영한다. 1980년대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 1990년대 조주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주역 무용수로 활약한 곳이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수석무용수 출신의 세계적인 발레리나 줄리 켄트가 2016년 3월 워싱턴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다시 한번 도약을 했다. 켄트와 오랜 친분이 있는 한국계 치료사 최기주씨의 추천을 받은 이은원은 비디오 영상 심사를 거쳐 2016년 9월 워싱턴발레단에 입단했다. 켄트는 미국 유명 발레잡지 ‘포인트(POINTE)’와의 인터뷰에서 “이은원이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해외에서 좀 더 배우길 원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채용 배경을 밝힌 바 있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부모님과 살았기 때문에 발레 외엔 신경 쓸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발레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발레단 입단 이후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했죠. 영어도 배워야 했고요. 현재 워싱턴발레단에 한국인 무용수가 저밖에 없어서 처음엔 힘들고 외로웠지만, 점점 친구도 생기고 생활도 익숙해졌습니다. 지금은 워싱턴에서의 삶이 정말 좋아요.”
이은원이 워싱턴발레단에서 금세 자리를 잡기까지는 오랫동안 존경해오던 켄트와 그의 남편이자 부감독인 빅터 바비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두 분의 스타일이 정말 다르다. 켄트 감독님이 연기 지도를 하면서 음악과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바비 부감독님은 작품의 배경이나 드라마의 흐름을 꼼꼼히 분석해서 이해하도록 만든다”고 밝혔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은원은 2018년 2월 존 크랑코 안무 ‘로미오와 줄리엣’의 오프닝 공연에 지안 카를로 페레즈와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당시 워싱턴포스트가 ‘새로운 스타 탄생’에 환호하는 리뷰를 내보내는 등 현지 무용 매체들이 이은원의 기량과 연기력을 주목하고 나섰다.
“워싱턴발레단 이적 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다양한 작품을 접했다는 거예요. 고전 작품을 중심으로 공연했던 국립발레단 시절과 달리 워싱턴발레단에서는 조지 발란신, 프레데릭 애슈턴,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저스틴 펙, 재시카 랭 등 현대 안무가들의 작품 비중이 높거든요. 제가 몰랐던 작품이 정말 많더라고요. 처음엔 움직임이 낯설거나 메소드가 달라서 고생했지만, 익숙해진 뒤에는 즐기면서 춤추고 있습니다.”
워싱턴발레단에서 승승장구하던 이은원에게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지난해다. 습관성 어깨 탈골을 막기 위해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2018년 겨울 ‘호두까기 인형’ 연습 도중 파트너가 팔을 강하게 잡는 바람에 처음으로 어깨 탈골을 경험한 그는 6번이나 재발을 겪었다. 지난해 5월 워싱턴발레단의 ‘지젤’ 오프닝 공연 당시에도 어깨 탈골 부상을 겪고 있었다. 관객은 그의 부상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이 공연을 마친 뒤 한국에 들어와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9월 미국에 다시 돌아간 그는 재활을 거쳐 지난 1월 무대에 복귀했다.
“켄트 감독님이 2022~2023시즌을 끝으로 워싱턴발레단을 떠나 9월부터 휴스턴발레단으로 옮깁니다. 워싱턴발레단도 새로운 예술감독이 오면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만 하더라도 오랫동안 파트너였던 지안 카를로가 켄트 감독님과 함께 휴스턴발레단으로 이적하기 때문에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게 되겠죠. 어쨌든 제가 미국에 와서 확실히 깨달은 것은 ‘제 삶이 행복해야 제 춤도 행복하다’는 건데요. 어떤 예술감독이 오든 행복하게 춤추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 무대도 꾸준히 서고 싶고요.”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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