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 오정세 삼키려던 공포의 어둑시니 정체
[김종성 기자]
SBS <악귀>는 한국 전통의 민속신앙을 하나씩 보여준다. 제8회 방송에서는 20세기 중반 들어 많이 잊혀진 추억의 요괴를 소환했다. 어덕서니·아독시니·아둑시니 등으로도 불리는 어둑시니라는 요괴가 그것이다.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악귀의 실체를 파헤치는 민속학 교수 염해상(오정세 분)은 지난 15일 제8회 방송에서 일대 모험을 시도했다. 악귀가 출현하는 지방에 가서 그곳 장승 앞에 선 염해상은 자기 손에 칼을 그었다. 그런 뒤 그 피를 장승에 묻혔다. 악귀의 정체에 다가서기 위한 그 나름의 시도였다.
잠시 뒤 방송은 장승 앞에 쓰러져 있는 염해상 쪽으로 주민들이 달려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뒤이어 염해상이 멍한 표정으로 방바닥에 앉아 있고 나이든 동네 여성이 밥을 떠주는 모습이 나온다. 여성은 "혼이 나갔네! 뭐라도 먹어야지 어떡해!"라며 안타까워하고, 염해상의 앞에는 검은 연기가 천장에서 벽면으로 번지는 광경이 펼쳐진다.
▲ 드라마 <악귀> 한 장면. |
ⓒ SBS |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어둑시니
요즘은 거의 회자되지 않는 어둑시니라는 단어는 1936년에 발표된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왼손잡이 행상인 허 생원이다. 장돌뱅이로 불리는 그는 이십 년이 넘도록 봉평장만큼은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방문했다. 봉평은 젊은 시절 그가 메밀꽃 하얗게 핀 달밤에 우연히 만난 처녀와 물레방아간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추억의 장소다.
허 생원은 장터를 돌아다니는 중에 동이라는 아들뻘 행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것과 동이의 외가가 봉평에 있다는 것과 동이가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다가 가출한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착찹한 감회에 사로잡힌 허 생원은 동이 어머니가 현재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발길을 돌린다.
어둑시니는 허 생원이 동이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는 장면에서 언급된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라며 "오랫동안 아둑시니 같이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메밀꽃 필 무렵>은 묘사한다. 혈육의 정이 일시적으로 시력을 강화시켜주는 인상적인 장면을 스케치하는 대목에서 어둑시니가 언급됐던 것이다.
1981년 9월 18일자 <조선일보> 12면 우단에 실린 소설가 김문수의 선운사 여행기에서도 어둑시니가 비슷하게 언급됐다. 소설가가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도솔산(선운산)에 위치한 선운사행 막차를 탄 것은 오후 6시 50분이다. "선운사 입구"라는 간판 글씨가 버스 헤드라이트에 비치고 뒤이어 "1박 7천 원의 호텔(분명히 호텔이었다)"에 들어가기 직전은 "밤 여덟 시가 훨씬 기운 시간"이었다.
소설가는 이 대목에서 어둑시니를 언급한다. "별자리는 머리 위에 턱 없이 가까웠고, 저만큼 어둑시니처럼 시커멓게 버티고 선 어느 산자락에선가 두견이 '솥 적다'고 풍년을 성화한다"고 묘사했다. 이효석은 시력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상태를 어둑시니로 부르고, 소설가 김문수는 시커먼 산자락을 보고 어둑시니를 떠올렸다.
언론인 리영희(1929~2010)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대담록인 <대화>에서도 어둑시니가 상세히 거론됐다. 2005년에 발간된 이 책에서, 1941년 생인 임헌영 소장은 평안북도 운산군 출신인 리영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유년 시절 평안도 말로 어둑서니에 대한 공포증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어느 지역이든지 어른들이 실제로 그것을 봤다고도 하고, 보지 않고도 겁에 질리기도 하지요. 저도 어렸을 때 도깨비다 하면 도망을 쳤는데, 선생님도 비슷한 체험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끔 어둑서니에 대한 꿈을 꾸신다고 하셨는데, 어렸을 때 거울에 비친 하나의 영상이 각인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기도 한다는 주장이 연상됩니다."
이 말을 들은 리영희는 자신이 꾸는 꿈을 다섯 가지로 유형화하다가 어둑시니에 대한 기억을 언급했다. "방금 임형이 얘기한 어둑서니의 꿈이 조금 색다른 것인데, 이건 소년기보다 더 앞선 유년기의 잠재의식이에요"라며 "평안북도의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겁줄 때 쓰던 달걀귀신이니 어둑서니 하는 엄청나게 무섭고 겁나는 허깨비에 쫓겨 온몸이 흠뻑 땀에 젖어 깨는 그런 꿈도 꾸지요"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유년 시절 평안도 말로 어둑서니에 대한 공포증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라는 위 대화 속의 언급은 1988년 6월 2일자 <한겨레> 1면에 실린 '백주의 평안도 도깨비 어덕서니'라는 리영희 칼럼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칼럼에서 리영희는 이렇게 회고했다.
"옛날 평안북도의 산간 마을에는 어덕서니라는 허깨비가 살고 있었다. 실체도 없는 것이, 무서운 괴물의 느낌으로 느닷없이 다가와서는 어린 것들을 겁주곤 했었다. 캄캄한 밤에 나타나는 도깨비의 일종이었다. 어덕서니는 있다고 생각해서 쳐다보면 점점 커져 하늘에 닿았고, 없다고 생각하고 보면 차츰 줄어들어 땅속으로 꺼져버렸다. 철이 들어 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어덕서니는 나를 겁주지 못하게 되었다."
커서 과학을 공부한 뒤에는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고 했지만, 76세 때 발간된 <대화>에서 그는 지금도 어둑시니 꿈을 꾼다고 말했다. 유년 시절에 한밤중에 집밖을 나섰다가 어둠이 꿈틀대는 듯한 느낌으로 인해 생긴 공포심이 꽤 오랫동안 지속됐던 것이다. "실체도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을 줬는지 알 수 있다.
▲ 드라마 <악귀> 한 장면. |
ⓒ SBS |
다른 민족들도 그렇지만, 우리 민족의 고대 신화에도 범신론과 유사한 관념이 많이 묻어 있다. 범신론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세상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관념을 연상시키는 것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도 발견된다.
환인 천제의 명령으로 지상에 강림한 환웅 천왕은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질병을 주관하고 선악을 주관했으니, 인간사 360여 가지 일을 대체로 주관"했다고 <삼국유사>는 말한다. 하늘의 위임을 받고 세상을 다스리는 집단이 바람과 비와 구름을 주관했다고 했다. 이는 바람과 비와 구름에 신의 작용이 깃들었다는 의미다.
이뿐 아니라 인간사 360여 가지 일에도 신의 작용이 깃들었다고 했다. 세상 어디에나 신의 손길이 미친다고 생각한 고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랬으니, 인간의 일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어두움이라는 자연현상에도 신이 깃들여 있으리라는 관념을 품게 됐으리라 볼 수 있다.
리영희는 "어덕서니는 있다고 생각해서 쳐다보면 점점 커져 하늘에 닿았고, 없다고 생각하고 보면 차츰 줄어들어 땅속으로 꺼져버렸다"고 말했다. 어둠에 대한 인간의 공포심이 어둑시니라는 신령한 존재를 만들어냈으리라는 판단을 갖게 하는 진술이다.
리영희는 어둑시니를 공포의 존재로 대했지만, 그가 일곱 살 때 발표된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공포의 의미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아둑시니 같이 눈이 어둡던"이라는 구절은 어둑시니를 공포스러운 요괴로 인식하기보다는 칠흙 같은 어둠의 대명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1930년대에 적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1981년에 나온 소설가 김문수의 기행문도 그런 식으로 어둑시니를 언급했다. "저만큼 어둑시니처럼 시커멓게 버티고 선 어느 산자락에선가 두견이 '솥 적다'고 풍년을 성화한다"는 구절에서는 어둑서니라는 단어가 두견새가 노래하는 낭만적인 풍경과 나란히 배치돼 있다. 이 같은 단어 배치는 어둑시니에 대한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어둑시니를 무서워하지 않는 20세기 후반의 시대 분위기에 어울린다.
20세기 초중반에 한반도에서는 전기 이용률이 급속히 높아졌다. 전등이 밤늦게까지 훤히 비추는 지방에서는 어둑시니에 대한 공포심이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전등의 확산은 어둑시니라는 요괴를 몰아내는 구마(驅魔)와 비슷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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