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김혜수 "'도둑들' 이후 물 공포증, 염정아씨도 놀랐다"
[이선필 기자]
▲ 영화 <밀수>에서 해녀 조춘자 역을 맡은 배우 김혜수. |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
'어느 도시에서 밀수에 참여했던 한 해녀가 있었다.'
영화 <밀수>는 이 단 한 줄의 기록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1970년대와 해녀, 그리고 밀수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지금의 이야기가 탄생했고, 가상의 어업도시 군천을 배경으로 배우 김혜수, 염정아, 박정민 등 지금의 배우들이 모이게 됐다.
공장 단지가 들어서며 바다가 오염되자 밀수에 뛰어들게 된 해녀들 중 김혜수의 조춘자는 어딘가 애잔하다. 강단 있는 모습으로 해녀들 사이에서 언니 노릇을 하지만, 군천이 고향이 아닌 떠도는 객사람으로서 마음 편히 스며들지 못한다. 결국 세관 단속 이후 밀고자 취급을 받게 되고 또다시 떠도는 삶을 사는 인물이다. 여성 액션을 전면에 내세운 <밀수>는 동시에 진정한 우정과 이해라는 주제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류승완 감독이 처음으로 도전하는 여성 서사라는 점도 흥미를 끈다.
액션과 우정의 조춘자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20일에 만난 김혜수는 조춘자의 처절하고 불안정한 내면을 언급했다. "생존 자체가 삶의 목표인 것으로 살아온 춘자는 감각과 본능에 의지는 인물"이라며 김혜수는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재밌고 흥미로웠다. 군천으로 오면서 정착한 듯하지만 결국 정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춘자의 삶이 보였다. 그런 경우 보통 두 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자기 존재를 스스로 무력화시키고 존재감 없이 살거나, 그렇지 않은 듯 강하게 살아가거나. 춘자는 후자의 인물로 보였다. 그래서 여러 위기를 맞이하며 무서웠음에도 더욱 큰 목소리를 내며 임기응변하는 모습이 있던 것이지. 그 모습에 제가 눈물이 나려하기도 했다."
악다구니만 남은 것 같은 조춘자지만, 의심을 사고 미움을 받으면서도 단짝 엄진숙(염정아)이나 동료 해녀를 애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여러 수중 액션이 돋보이는 와중에 이런 해녀들의 우정은 <밀수>의 입체적 재미를 담보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여기에 월남전에서 돌아온 뒤 전국구 밀수꾼이 된 권 상사(조인성)의 개입으로 극적 긴장감이 배가된다. 조춘자의 생명줄을 쥐고 흔들며, 군천 내 해녀들을 군림하던 장도리(박정민)와의 대립도 <밀수>의 주요 포인트다.
"생존이 목표인 인물이 살기 위해 진심을 내보이는 부분, 조건 없이 진숙에게 마음을 보이는 부분에서 수위조절이 중요했다. 진심이지만 완전하게 드러내진 않는 건데 관객분들을 잠시 속이거나 착각하게 만드는 장치가 영화 내에 있었다. 그래서 제가 무언가를 돋보이게 하거나 덧붙이기보다는 시나리오 안에서 잘 소화해내는 게 우선이었다.
▲ 영화 <밀수>의 한 장면. |
ⓒ NEW |
김재화, 박경혜 등 함께 연기한 해녀 배우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김혜수는 "정말 기량이 좋고 진심이고 열정적인 배우를 만나게 돼 너무 감사했다"며 "선후배가 아닌 동료라고 생각했다. 나이 많고, 선배라고 별 수가 있는 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저 또한 나이가 좀 더 있다고 뭘 이끌어야지 생각하기보다 그 상황에 충실하고, 집중하려 했다"고 특별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런 것들이 시나리오에서 보였기에 물 공포증이 있었음에도 작품을 택했을 것이다. <도둑들> 촬영 이후 그 공포감이 생기게 됐다던 김혜수는 "이번 촬영 초반에도 그런 공포가 와서 힘들었는데 동료 배우들이 물에 들어가는 모습에 박수치고 좋아하다가 자연스럽게 그게 없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전했다.
"정작 <도둑들> 때는 그게 공황인 걸 몰랐다. 수중 촬영 분량이 많지 않아 걱정하지도 않았지, 물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고. 근데 이상한 상태를 경험했고 나중에서야 그게 공황임을 알게 됐다. 그 이후론 물에 안들어갔다. 근데 <밀수>는 해녀 영화고 물속 연기를 준비하는 과정이 필수였다. 염정아씨도 아예 수영을 못했고, 다른 배우들도 수영이나 잠수 경험이 대부분 없었다. 그럼에도 정말 철저히 준비해오셨고, 그 모습에 저도 물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더라. 나중에 정아씨가 제 모습을 보고 '감독님, 이 언니 물 밑에서 말도 해요!'라고 하더라(웃음)."
3.5 미터 깊이의 수면 세트, 그리고 6미터가량 잠수해야 했던 수중 세트 등을 언급하며 김혜수는 "아마 해녀 액션은 세계 최초고, 유일무이일 것이다. 물론 위험한 장면에선 대역이 있었지만, 대부분을 배우들이 직접 해냈다"며 "조언하고 검수해주시는 해녀분들이 배우들을 보고 놀랐다. 특히 김재화씨를 보고선 해녀보다 더 해녀같다고 할 정도였다"며 해녀 액션의 묘미를 언급했다.
"책임감 의식보단 매번 최선을 다하려 해"
영화로 처음 만난 류승완 감독에 김혜수는 "어떤 상황에서든 캐릭터가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끔 하는 분"이라며 무한 신뢰를 보였다. 시나리오를 받고 출연 결정을 한 후에도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 촬영 탓에 긴밀하게 만나진 못한 사연을 전하면서 그는 "문자와 통화 등으로 많은 자료를 주고받았다. 감독님이 그런 소통에 굉장히 열려 있고, 수렴도 잘 해주셨다"고 말했다.
"다른 작품하고 거의 쉴 틈 없이 이번 영화에 들어갔는데도 불안함이 없었다. 물론 아주 없진 않았겠지만 감독님과 조율 과정에서 든든함을 느꼈다. 감독님 작품을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액션이든 드라마든 혹은 <밀수>처럼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하든 진중함과 가벼움이 공존하고 상황 유머가 담겨있다. 단순히 웃음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닌 공감이 가는 웃음이다. 그 보편성의 힘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또하나의 주인공이 70년대라는 시대 배경이다. 많은 자료를 검토했다. 감독님도 그렇고 여러 스태프분들이 정말 많은 자료를 공유해주셨다. 그걸 바탕으로 저도 길을 잡아가려 했다. 제가 너무 신기해서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이 있다. 다방의 소품들, 움직이는 보조 출연자분들의 외피들. 모든 게 1970년대를 그럴싸하게 옮긴 게 아니라 정말 실제 그대로 재현한 것만 같았다. 영화적 공간이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 어느 동네를 가면 그렇겠구나 생각할 정도였다."
권 상사와의 로맨스는 시나리오에 없었지만, 현장에서 배우들이 함께 느끼는 대로 연기에 반영한 결과였다. 춘자를 윽박지르고 협박하며 돈을 갈취하려던 권 상사는 춘자의 비범함을 느끼고 함께 군천으로 내려가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위기를 겪으며 나름 연애 감정이 싹 튼 것.
▲ 영화 <밀수>에서 해녀 조춘자 역을 맡은 배우 김혜수. |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
이와 함께 박정민의 새로운 면모, 고민시의 기본에 충실한 연기를 언급하며 김혜수는 한껏 애정을 드러냈다. 그만큼 현장과 동료를 사랑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의 포용과 겸손이 오래도록 관객에게 사랑받는 비결 아닐까. 쑥쓰러운 듯 이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기본적으로 관객분들이 영화를 보겠다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그냥 나 스스로 열심히 연기했다 정도로 만족하게 된다. 다행히 전 캐릭터로 말할 수 있는 몇 작품이 생겼고, 사랑해주셨다. 하지만 일부러 어떤 유행이나 특정한 코드를 감지한다고 작품을 하진 않는 것 같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려 한다. 현장에서 맏언니 소릴 듣는 것도 그냥 경력이 생기다 보니 그런 것이지. 제가 언니 역할을 잘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전 제 역할과 연기가 작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제대로 하는 게 목표다. 영화나 역할에서 책임감은 일부러 느끼려 하진 않는다. 솔직히 그 책임감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제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인데 내 정체성은 체력이고, 책임감도 체력이다. 작품 하나 잘 해나가는 것도 매번 쉽지 않다. 어려운 역할은 늘 어렵고, 재밌는 역할도 마냥 쉽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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