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 BTS성지뿐이 아니었네···순례길로 떠나는 전북
군산 전주 김제 완주 등 돌며 선교 유산, 지역 명소 함께 누릴 기회
‘주일예배 등록 교인 40명. 종이 문막이로 두 개의 방이 분리된 예배당에 남녀가 각각의 공간에서 예배를 드림. 헌금 총액은 16달러 6센트와 엽전 530전. 이 헌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 예정.’
우리나라 호남 지역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매클리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가 1897년 어느 주일 전북 군산에서의 예배 모습을 미국 남장로회선교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나 명문 워싱턴 앤 리 대(Washington & Lee University)와 유니온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를 졸업한 그는 1891년 안식년 차 미국에 들른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보고회에서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듣고 자원해 조선을 찾았다.
그가 군산 수덕산 자락(현 월명공원 일대)에 초가 두 채를 50달러에 구입한 뒤 뿌리기 시작한 복음의 씨앗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선 굵은 자취를 남겼다. 1895년 호남 최초로 군산 일대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웠고 전주 익산 김제 지역을 오가며 선교 열정을 불태웠다.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하며 길선주 목사 등 한국교회 초기 목회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과거 복음의 불모지였던 전북 지역은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거듭나 ‘한국의 갈릴리’로 불린다. 전북CBS는 전주시, 성지순례 전문여행사 돌봄여행사와 함께 전북의 각 지역이 품고 있는 숭고한 선교 역사를 날실과 씨실로 엮은 순례길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전북 지역 주요 선교지들이 순례길로 조성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민일보는 20~21일 순례길 탐방단과 동행하며 이 지역에 흩뿌려진 선교의 터를 걸어봤다.
“이곳에 적힌 이름을 보십시오. 조지 시드니 프란시스. 바로 전킨 선교사의 세 아들 이름입니다. 그는 첫째 아들을 두 살 만에, 둘째 아들을 생후 2개월 만에, 셋째 아들을 생후 20일 만에 떠나보낸 아버지였습니다. 한 아이를 묻은 무덤에 풀이 자라기도 전에 또 다른 아이의 죽음을 맞고, 그 아이의 무덤에 풀이 자라기도 전에 세 번째 아이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묘비 앞에 선 해설사의 설명에 30여명의 탐방단은 숙연하게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바라봤다. 20일 찾은 이곳은 전주기독교근대역사관 인근 언덕에 조성된 선교사 묘역이다. 묘역에는 선교 초기 전북지역 복음화에 헌신했던 선교사와 그 자녀 등 20여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지난해 10월 개관한 전주기독교근대역사관은 전북 지역의 130여년 선교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명소다. 전주시 완산구 전주예수병원 맞은 편에 연면적 2758m²(약 835평)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됐다.
2층 기독교 근대역사기념실에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 7인 선교사가 조선에 오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일제시대 전주 개신교인의 활동을 주제로 한 영상 콘텐츠와 체험 중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3층 구바울(Paul S. Crane) 기념 의학박물관은 2009년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의료분야 목록에 등재된 5가지 유물과 선교를 위해 사용됐던 수백 가지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전통적 박물관의 관람 방식을 벗어나 선택형 아카이브, QR코드를 접목한 유물 해설 등을 활용해 직관적이고 현대적으로 선교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순례길 1코스는 전주 한옥마을 인근 반경 2km 구간을 잇는 순례길이다. 전주시근대역사기념관을 출발해 한강 이남 최초의 근대식 의료시설인 예수병원과 학생 항일운동의 중심지 신흥학교를 거쳐 김인전 목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전주 서문교회, 남문교회에 이르는 코스는 전주의 ‘바이블 벨트’로 불린다. 정림건축 고 김정철 선생의 작품인 서문교회는 정적인 전주의 분위기를 예배당에 녹여낸 걸작으로 꼽힌다.
2코스는 전라북도에 60여 교회를 개척한 루터 올리버 맥커친(L.O. McCutchen, 한국명 마로덕)선교사의 길을 잇는다. 123년 역사의 완주 위봉교회를 시작점으로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성도들을 추모하는 순교비가 세워진 학동·수만·신월 교회 등을 순례하며 맥커친 선교사의 발자취를 좇아가본다.
구한말 파송된 맥커친 선교사는 전주와 완주, 진안 등지에 60여 개의 교회를 세우며 ‘복음의 족적’을 남긴 선교사다. ‘마로덕’이라는 한국식 이름에는 ‘말을 타고 험한 길을 건너 덕을 전한 사람’이란 뜻이 담겨있다. 몇 해 전 위봉교회에서는 1907년 당시 당회록과 세례교인 명부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위봉교회 인근엔 그룹 BTS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을 찾는 K팝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위봉산성과 아원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3코스는 ‘근대도시’ 군산과 김제를 연결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숱한 수탈의 아픔을 겪었지만, 복음으로 치유돼 다시 일어선 두 도시의 역사를 순례자의 발걸음으로 따라가 본다. 출발점은 옛 군산세관이다. 일제 시절 수탈 창구로 기능한 이곳은 전킨 선교사가 선교의 첫발을 뗀 역사적 장소다.
21일 현장 해설사로 나선 전킨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서종표(군산중동교회) 목사는 “43세의 젊은 일기로 순교한 전킨 선교사는 세 아들을 잃는 아픔 속에서도 ‘오직 선교’라는 소명 의식으로 선교지였던 호남 지역을 끌어안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었다”고 소개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등이 자리한 군산 근대화 거리를 가로지르면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을 마주하게 된다. 이화학당 설립자인 그는 1902년 성경 번역 모임 참석차 목포로 가는 도중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사고로 순직했다.
초창기 호남 선교 기지인 구암교회는 순례 여정의 백미다. 1919년 3·5만세운동이 벌어진 장소로 옛 예배당은 현재 기념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호남 선교의 문을 연 곳이자 독립운동의 성지인 구암교회에서 민족과 함께 호흡해온 한국 기독교 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다.
세계 최장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오른 새만금 방조제(33.9km)를 내달려 만경 평야에 다다르면 ‘노아의 방주’를 본떠 지은 김제 죽동교회를 볼 수 있다. 벽돌로 쌓아 올린 아담한 예배당으로 이 동네의 숨은 ‘사진 맛집’이다. ‘기역자(ㄱ)’로 유명한 금산교회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전통문화와 어우러진 초기 교회의 모습 엿볼 수 있다. 기역자로 꺾인 건물에서 각각 남성과 여성이 앉아 서로를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인데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교회 건축 양식이다.
1~4코스로 구성된 ‘전북순례길’은 코스별로 당일, 1박 2일, 2박 3일 등으로 세분화해 운영된다. 추후 매일 서울-전주를 왕복하는 투어버스를 운영할 계획이다. 모든 일정에는 전문 해설사가 동행한다.
전북순례길 투어 프로그램의 중요한 특징은 전체 일정에 동행하는 여행 가이드나 특정 큐레이터가 아니라 선교 역사 현장의 오늘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해설사로 나선다는 점이다. 신흥학교에선 학교장을 비롯해 순례 역사를 잘 아는 교직원이, 서문교회 남문교회 등에선 교회의 역사위원장과 담임 목회자가 직접 탐방객을 맞이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했던 지역 교회와 성도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연대를 강화하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전북CBS측은 “세대를 초월해 찾아오는 전북 주요 도시의 도심 핫플레이스에서 선교 역사와 유산을 뜻깊게 발견하고, 전라북도가 복음화율 전국 1위의 전라‘복’도가 된 비결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순례길 프로그램을 세밀하게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주, 군산=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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