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아니라는데 檢 "천경자 진품"...'미인도 손배소' 유족 졌다
고(故) 천경자(1924~2015) 화백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4단독 최형준 판사는 21일 오전 열린 선고기일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檢 ‘미인도 진품으로 판단’… 法 “판단 결과 표현, 위법 아냐”
이 사건은 천 화백의 딸인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컬리지 교수가 2019년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감정인에게 부당한 영향을 미치는 등 부실한 수사를 했고, 허위사실을 유포해 천 화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건이다. 2016년 고 천경자 화백의 그림으로 알려졌던 ‘미인도’와 엮인 사건을 수사한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미인도는 천경자 화백이 그린 진품이 맞다’고 밝힌 데 대해서다.
최 판사는 수사 과정에서 ‘이 작품 진품이라고 보면 어때요’라고 검찰이 말했다는 주장에 대해 “감정절차에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수사 당시 미인도에 대한 진품·가품 양쪽 감정결과 모두 있었는데 ‘진품’결론을 내린 데 대해서도 “근거없이 배제하거나 합리성을 결여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허위사실로 천 화백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에 대해 최판사는 “수사를 통한 분석 결과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그 판단결과를 표현한 것”이라며 “그 표현 자체가 위법부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작가는 “내가 안 그렸다”는데, 남들은 “작가가 그린 진품”
‘미인도’를 둘러싼 위작 논란의 역사는 32년이 넘는다. 이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1991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가무잡잡한 톤의 볼이 패인 얼굴, 공허한 눈빛이 특징인 작품이다.
그러나 천경자 화백이 “이것은 내가 그린 작품이 아니다”라고 수 차례 인터뷰 등에서 공식적으로 주장하며 ‘위작’ 논란이 시작됐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화랑협회 등과 함께 조사를 벌여 ‘진품’ 판정을 했고, 천 화백은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잠시 붓을 꺾고 미국으로 떠나 있기도 했다.
1999년 당시 유명했던 고서화 위조범 권춘식이 “내가 미인도를 위조했다”고 검찰에 자백하며 다시 ‘미인도 위작 논란’이 수면위로 떠올랐지만, 국립현대박물관은 “권춘식은 수묵화 위조 전문이고, 위조 시점이 맞지 않다”며 반박했다. 검찰은 그림을 위조한 혐의(사도화 위조)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난 사안이라고 판단해 수사가 진행되진 않았다.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다시 감정을 맡긴 결과 한국화랑협회는 또다시 ‘진품’ 이라고 판단했다.
한동안 가라앉았던 논란은 2015년 천 화백이 세상을 떠난 뒤 다시 불이 붙었다. 2016년 3월, 또 다른 일로 검찰 수사를 받던 권춘식이 ‘미인도’에 대해 “내가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을 바꾼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과 두 달 뒤 또 “내가 그렸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모나리자 감정팀 ‘위작’ 판정, 검찰은 ‘진품’ 결론
15년 넘게 이어진 논쟁은 결국 형사사건으로 번졌다. ‘위작 미인도 폐기와 작가 인권 옹호를 위한 공동변호인단’은 바르토메우 마리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6명을 사자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허위공문서작성‧행사 등으로 검찰에 고소했고, 수사를 위해 ‘미인도’가 25년만에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 밖으로 나와 서울중앙지검에 제출됐다. 이 수사와 재판 과정을 위해 김정희 교수는 친생자확인소송까지 했다. 사자명예훼손죄 고소는 친족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이 된 미인도의 감정은 김 교수 측에서 요청한 프랑스 감정팀 ‘뤼미에르’가 맡았다. 뤼미에르는 모나리자 밑그림을 밝혀낸 감정팀이다. 이들은 2016년 11월, 미인도를 ‘위작’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감정, 분석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며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가품이 진품으로 들어오면, 작가 가치 손상”… 항소 검토
검찰은 2016년 12월 피고소된 6명 중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에 대해서만 ‘언론기고로 사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인정해 불구속 기소하고, 나머지 5명에 대해선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김 교수 등이 반발해 검찰에 항고하고, 천 화백이 1991년에 작성했다는 자필 공증 서류도 공개했지만 기각됐다. 정 전 학예실장은 사자명예훼손죄로 대법원까지 간 끝에 2019년 7월 무죄가 확정됐다.
김 교수는 2019년 12월, 국가를 상대로 이번 사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처음엔 가액 3000만원으로 제기해 소액 재판부에 배당됐다가, 2021년 가액을 올려 일반 민사단독 재판부에 재배당됐다.
지난 4월 28일 마지막 변론에서 변호인은 “진품이라 확인되는 게 무슨 손해가 있느냐, 하실 수도 있지만 이렇게 질이 떨어지는 작품이 진품으로 인정되면 작가의 가치가 손상된다”며 “문제있는 작품이 하나라도 ‘진품’으로 들어오면, 그 외의 위작들을 판단할 때 가품이 쓰일 수 있어 진품과 가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품이 가품이 되는 것보다, 진품이 아닌 게 ‘진품’이 되는 게 더 치명적 손실이고, 미술계에도 영향이 크다”며 “그래서 이렇게 절실하게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 측은 21일 선고 직후 항소 내지는 수사기록 공개청구 등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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