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뿌리가 적나라하게... 육사 안 표지석의 씁쓸한 다섯글자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 2023. 7. 21.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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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0] 대한민국 성장사와 성장통의 현장, 국방경비대 창설지

윤태옥(답사 여행객)

 육사 기념관 충혼탑에서 보는 전망
ⓒ 윤태옥
   
서울 노원구 태릉 육군사관학교 기념관 충혼탑의 64미터 전망대에 오르면 탁 트인 시야에 가슴이 활짝 열리면서 감탄사가 절로 새어나온다. 파란 하늘 아래 그리 높지 않은 능선들이 야트막한 담장을 이뤄 널찍한 평지를 포근하게 안고 있다. 축구장 세 개는 들어갈 만한 육사 연병장은 그 넓이만으로도 젊은 생도들의 포부를 키워줄 것 같다. 

육군사관학교 터는 서에는 중랑천이, 동에는 왕숙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해자와 다를 바 없다. 북으로는 불암산 수락산이 현무문처럼 막아준다. 남으로는 남산 대신 검암산과 봉화산이 있고, 그 너머에는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이 한강까지 이어진다. 도성과 성벽처럼 보인다.

이 지역은 급수도 유리하고 방어에도 좋고 사방으로 교통이 연결되는 요충지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삼국시대부터 군사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방어에 중요한 진지였고, 불암산의 태릉과 강릉, 검암산의 동구릉과 같은 왕릉도 들어섰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대의 주둔지의 하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조선인 지원병 훈련소가 있었다. 일제 패망 직후에는 좌익 군사단체가 차지하기도 했다.

1948년 1월 15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당하고 39년이 흐른 뒤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가 바로 이곳에서 창설됐다. 

창설 당시 국방경비대 본부는 지금의 육사 도서관 자리였다. 그곳에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창설지'라는 표지만 있다. 육군박물관 입구에 '국군의 모체 국방경비대'라는 표지석이 있다. 또 다른 잔디밭에는 비호여단 장병들이 세운 '국군의 모체 국방경비대 1연대 창설기념비'도 있다. 국군의 태동지라고 하기엔 살짝 아쉬운 감도 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꽤나 의미심장한 장소임은 틀림없다.

국군의 '모체'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창설지 표지석
ⓒ 윤태옥
 
 국방경비대 1연대 창설기념비
ⓒ 윤태옥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군대로서의 국군은, 형식논리로는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탄생했다. 그러나 실체로서의 국군은 정부수립 이전에 미군정이 국방경비대 1연대를 창설하면서 시작됐다. 조직 자체는 미군정에 속해 있었지만 조선인들이 적극 참여했고, 2년 반 후에는 대한민국의 국군으로 전환하는 무장조직이었다. 

국군의 모체라는 말에서 당시 우리의 형편이 그대로 배어 나온다. 우리는 직접 일본군을 격파하지 못했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대일 승전국이 되지도 못했다.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해 점령당한 입장이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호의를 표시하며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켜준다고 공언했지만 속내는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것은 불변의 최우선 전제였다. 

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이 성공적이었으면? 독립운동은 이념적으로는 여러 갈래였지만 당-군-정이라는 항일과 국권회복의 단계별 방책에서는 동일했다. 당(이념)으로 인민을 모으고, 독립군(무력)을 조직해 일본군을 몰아낸 다음 당당히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든,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이든, 중국공산당에 참여한 조선인들의 동북항일연군이든, 연해주로 피신해 소련 88여단에 속해있던 조선인들이 조직한 조선공작단도 마찬가지였다. 만주에서 조선혁명당이 조선혁명군과 국민부라는 삼각구도를 이룬 것도, 한국독립당이 한국독립군을 영도한 것도 그렇다.  

미국은 우리의 입장과는 달랐다. 승전국의 점령군이라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군정을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 점령의 전략적 목표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미군의 경우 당에 해당하는 정치권에서는 좌익을 배제하고 우익과 중도만으로 구성하려고 했다. 1946년 2월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12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한 것이 그것이다. 같은 해 5월 미군정이 정판사 사건을 터뜨려 당시 최대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한 것도, 여운형 테러를 포함한 수많은 시국사건을 수사하면서 우익에는 미온적이고 좌익에게는 공격적이었던 것이 모두 같은 흐름이었다. 

행정기구와 경찰은 조선총독부 조직을 부활시켰다. 절대다수의 조선인들이 당연시했던 친일청산은 그들의 전략목표와 군정의 편익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이와 병행해 군에 대해서는 군정법령 28호(1945.11.13)로 미군정 안에 국방사령부를 두고 그 아래 경무국 군무국을 설치함으로써 일찌감치 창군 작업에 착수했다. 한반도의 국가건설을 논의하는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미군정이 창설한 국방경비대
       
 남조선경비대 1연대 단체사진
ⓒ 윤태옥
 
국방경비대 창설 이전에 우리의 자발적인 군사적 활동은 활발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군대 경험자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건군운동이 그것이다. 광복군국내지대, 국군준비대, 학병동맹, 학병단, 대한국군준비위원회, 조선임시군사준비위원회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한 미군정은 군정명령 3호와 5호를 통해 일반인들의 군사적 활동이나 무장을 금지했다.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이나 김구의 임시정부를 부정하듯 이들 군사단체들의 건군운동 역시 부정한 것이다. 미군정의 금지조치로 인해 군사단체들은 위축되고 일부 군사단체들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미군정은 1948년 1월부터 국방경비대 9개 연대를 하나씩 창설해갔다. 당시의 공식 명칭은 남조선경비대였다. 애초에 국방경비대라고 했으나 소련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반도의 국가수립에 대해 미소가 합의하기 전에 국방이란 간판을 내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찰예비대로서 조선경비대라고 했으나, 미군정의 관할은 북조선에 미칠 수 없다고 하여 남조선경비대로 귀착된 것이다. 당시의 문서에서는 조선경비대라는 단어 앞에 교정표시를 하여 남(南)이라는 글자를 추가하기도 했다. 우리가 분할되고 점령됐다는 냉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국방경비대는 간부와 사병을 따로 모집했다. 간부는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많았고, 사병은 각 지역에서 모병했다. 미군정은 정치적 중립이란 원칙을 세웠고, 인적 구성은 친일여부가 아니라 군사적 능력과 미군정에 대한 충성도 등을 우선시했다.

이에 따라 국방경비대에는 좌에서 우까지, 김창룡과 학병단과 같은 극우 성향에서 남로당 소속까지 다양했다. 독립군과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도 혼재했다. 일본군 경력자들이 적극적으로 입대한 반면 독립군 출신들은 국방경비대에는 소극적이었다. 사병들은 관할지역에서 모병한 향토연대로써 사병들끼리의 유대가 밀접한 편이었다. 이런 동질감은, 창설 다음해 여수의 14연대 일부가 제주4.3 진압 출동명령을 동족상잔이라며 거부하고 일으킨 군사반란이 연대 내에서 쉽게 확산되는 정서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국방경비대는 서울과 8도에 하나씩 모두 9개 연대가 창설됐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태릉에서 창설된 1연대였다. 1연대의 창설 중대장으로 일본군 소좌 출신의 채병덕이 임명됐다. 2연대는 충남 대전 비행장에서, 3연대는 전북 이리에서, 4연대는 전남 광산에서 창설됐다. 5연대는 경남 부산, 6연대는 경북 대구, 7연대는 충북 청주, 8연대는 강원 춘천, 9연대는 제주였다. 각 연대는 모병을 거쳐 편성을 완료하기까지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걸렸다. 1연대 창설 1년 후에 국방경비대는 총 1만8000여 병력을 가진 군대로 성장했다.
 
 남산 1여단 창설지
ⓒ 김학규
 
 1연대 연대기
ⓒ 윤태옥
 
 국방경비대 제1연대기 관련 설명
ⓒ 윤태옥
 
대한민국 군대의 '씁쓸한' 성장과정

1947년 하반기부터 국방경비대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1연대(경기) 7연대(충북) 8연대(강원)를 통할하는 제1여단을 창설하면서 여단체제로 발전했다. 정부수립 직후에는 5개 여단 15개 연대로 증편됐다. 11월에는 4일 동안 김해에서 대규모 야외기동 전투훈련을 실시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국가의 물리력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러나 좌우와 남북의 갈등과 미소의 냉전이라는 격랑 속에서 국방경비대-국군은 또 다른 방향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제주4.3과 여순10.19라는 중대한 사건이 급격한 변화에 불을 붙였다. 4.3은 민간인들의 무장봉기였고 10.19는 군내의 반란이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군대의 위상이 달라졌다. 4.3의 진압은 초기만 하더라도 경찰이 주도했으나 5월 5일 미군정 주도하에 군경수뇌부합동회의가 열리면서 국방경비대가 전면에 나섰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군은 더욱 강경하게 진압에 나섰다.

여순10.19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경찰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그 이전에는 서로 총격전을 벌여 국방경비대 쪽에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경찰의 역량은 우세했었다. 그러나 국방경비대의 무장이 강화되고 작전능력이 신장되고, 무장대와 반란군 진압이란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자 군대가 우월한 지위에서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군대의 성장과정이기도 했다.

군경의 갈등은 국가건설 과정에서의 성장통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불거졌다. 제주4.3에서 국방경비대는 미군정의 지휘를 받아 강경하게 진압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의 방침에 따라 국군은 더욱 강경하게 대처해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무장대와 반란군의 진압을 넘어서서 민간인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앞의 글 세 편에서 살펴본 참극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군과 민 사이에는 높은 산, 깊은 골이 생겼다. 누군가는 목숨까지 던지는 강력한 옹호의 대상이 되거나, 반대편에서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원한의 대상이 됐다.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는 숙군, 곧 군대 내에서의 숙청작업이었다. 넓게 보면 좌익을, 당시의 이슈로 보면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정파로 좁히면 남조선노동당 세력을 군대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4.3과 10.19 이전에도 숙군작업이 있었지만 특정한 사건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했었다. 그러나 4.3에서 박진경 연대장이 강경진압으로 인해 남로당 소속의 부하 장병들에게 암살을 당하고, 남로당 계열의 사병들이 중심이 돼 여수 14연대가 10.19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숙군작업은 광범위하고 격렬해졌다. 
 
 여순당시 국군 배치(지도 참고 : 주철희의 여순항쟁 답사기)
ⓒ 박종현
 
군인정치의 서막

잘 알려진 숙군으로 처벌된 군인은 박정희다. 1948년 12월 20일 국방부 특명 제5호에 따라 설치돼 육군본부에서 열린 고등군법회의는 박정희를 포함한 68명의 군인들을 국방경비법 제18조(반란기도죄) 위반 혐의로 재판했다. 이들은 1946년부터 서울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해 무력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반란을 기도한 혐의로 기소됐다.

박정희는 국방경비법 제32조의 군병력제공죄가 추가됐다. 박정희는 파면과 급료몰수 그리고 무기징역의 판결이 내려졌으나, 심사장관의 조치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고 징역형은 집행을 정지시켰다. 판결 후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 때까지 숙군 담당부서인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했다. 배반이라고도 하고 확실한 전향이라고도 하는.

숙군은 열대성 저기압이 습기를 빨아들인 태풍처럼 커져갔다. 군인이 아닌 정치인을 포함한 민간인까지 숙군대상이 됐다. 여순사건 이전에는 경찰이 수사한 뒤 군과 관련된 경우에만 그 정보를 군에 제공했다. 그러나 여순사건 이후 민간인을 군 정보기구가 직접 수사했고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렇게 군인이 정치에 개입했고, 권력은 그것을 용인하고 활용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과 보도연맹 사건 등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멈추고 십년이 지나지 않아 군사쿠데타가 발생했고, 군사쿠데타 이후 우리 사회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이로 인한 고통과 불신이 어땠는지는 새삼 재론할 것은 없다. 
     
 국방경비대 창설지는 현재 육군사관학교인데, 육사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누구든 관람할 수 있다.
ⓒ 윤태옥
 
나 자신도, 비록 한국전쟁 삼십년 후이긴 해도, 해병대의 빨간 명찰을 달고 만기복무를 했고 지금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영역에 머물렀고 군 전체에 대한 신뢰나 존경으로 잇기는 힘들었다. 국민이 외적을 지키라고 마련해준 무기를 들고 나와 외적이 아닌 자국민을 겨누면서 자국의 국가기구를 마비시킨 군사쿠데타, 그리고 항의하는 시민들을 향한 발포, 그렇게 잡은 권력에 대해 또다시 항의하고 탄압하는 악순환이 나와 군 사이의 거리를 정한 것이다. 그 씨앗은 멀리 학살과 숙군에서부터 그어진 것 같다.

다행인 건, 정전 50여 년 만에 우리나라가 민주화를 이루어냈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잡아가면서 내 마음속의 구분선도 서서히 사그라졌다는 것이다. 

참고로, 국방경비대 창설지는 현재 육군사관학교인데, 육사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누구든 관람할 수 있다. 우리 역사와 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아보기를 권한다. 관계자들이 참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수도권이 아니라면 국방경비대 2~9연대의 창설지에는 어떤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은 어떠한가. 역사는 현장에서 보면 더 실감난다. 그래서 다음 행선지는 북한 인민군이다.

[필자 알림] 

2020년 이후 계속해온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답사여행 – 휴전선(강화·교동~강원·고성)>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휴전선 답사여행 9차(10.20~25)에 동반하고자 하는 독자는 다음 링크의 공지를 찬찬히 읽어본 뒤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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