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아직 책을 내지 않은 당신에게
저자의 글을 읽고 나를 찌른 문장을 간직한다
책을 내려고 시인이 되거나 소설가가 되지는 않는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게 수필이라는 오해가 세간에는 널리 퍼져 있지만, 역시 책을 내기 위해서만 수필을 쓰지 않는다. 인생의 어떤 순간은 글이 된다. 어떤 강렬한 기록으로, 혹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문학적인 글은 쓰인다. 글을 쓰게 만드는 동력이 책 출간까지 이어질 때 새로운 문학이 탄생한다.
열여덟 살 고등학교 시절에 장래 희망란에 ‘시인’을 적었던 진은영 시인은 나중에 생활기록부를 보고 웃었다. 자상한 선생님은 시인이라는 답에 걱정이 크셨던지 ‘국어 교사’라고 정성스레 바꿔놓았던 것이다. 시인을 희망했지만 시를 당장 쓰지 못했다. 공무원이 돼 동사무소에서 민원을 처리하던 진 시인은 옆자리 동료의 말에 귀를 세웠다. “시를 쓰고 싶다고? 그럼 철학을 공부해야지.” 스스로 몽상가라고 칭했던 진 시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사회생활을 멈추고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시를 썼다. 철학 공부와 시는 같은 것이었다. 왜 사는가. 삶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타인에게 어떻게 가닿을 수 있는가. 왜, 무엇으로, 어떻게라는 질문을 언어로 사유하고 형상화하는 것이 철학이고 시였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시 ‘청혼’의 시구들은 독자들에게 스몄다. 한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마음에 힘을 불어넣었다.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간섭하고 침범한 셈이다. 폐가 아픈 시인은 종종 기침을 한다. 가르치는 직업을 가졌지만 좀처럼 대외 강연을 하지 않는다. 그런 시인의 드문 강연을 운 좋게 들었다.
프랑스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개념을 설명하며 강연은 시작됐다. “마치 화살처럼 그 장면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오는 것. 라틴어에는 뾰족한 도구에 의한 이 상처, 이 찌름, 이 상흔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 푼크툼을 찾으라고, 시를 읽을 때 무엇이 나를 찌르는지, 그 시구를 먼저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이어 바르트의 문장을 인용했다. “만약 당신이 나무에 못을 박는다면, 나무는 당신이 어디를 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함께 읽은 시는 페루 시인 세사르 바예호의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로 시작하는 시였다. 이 시에서 나의 푼크툼을 찾았다. “모두들 아는데… 그러나 빛이/ 폐병 환자라는 건 모릅니다/ 어둠이 통통하다는 것도….” 빛과 어둠의 은유가 나를 찔렀다. 진 시인은 기침을 조금 한 뒤에 말했다. 폐병 환자는 기침을 멈출 수가 없다고. 짧게 그리고 쉼 없이 이어지는 것이 기침이라고. 인생의 빛은 통통한 어둠 속에서도 폐병 환자처럼 마른 몸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기침 같은 거 아니겠냐고. 시의 섬광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시를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겠지만 시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읽으니, 답답한 마음이 빛으로 녹아 흐르는 듯했다.
철학자인 진 시인의 글에서는 하이데거나 니체의 문장이 적절하게 인용되곤 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아직 오지 않은 자신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그 앞에 서보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진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이에요.” 남몰래 열망하고 사랑했던 것들, 과일 속의 씨앗처럼 숨기고 있는 내 영혼과 대화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던진 문장이었다. 진 시인이 글을 쓰려는 열망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책을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바르트와 바예호, 하이데거를 다르게 읽었을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먼저 책을 낸 저자의 글을 읽고 나를 찌른 문장을 간직한다. 책을 안 읽어도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천재거나 오만한 바보일 가능성이 크다는데 한 표다. 읽고 쓰는 일은 연결된다. 세상 어디에선가 글을 쓰고 있는 당신에게 감사하다. 나를 찌르고 상처 입힐 기막힌 책이 또 탄생할 수 있으니까.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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