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최종병기’ 핵잠에 오른 대통령
“뜻깊고 정말 든든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외국 정상으론 최초로 미 전략핵잠수함(SSBN)에 올라 한 말이다. 그럴만했다. SSBN은 미 핵전력의 ‘최종병기’로 불린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사거리의 ‘트라이던트-Ⅱ D5’ 24기를 적재했고, 탄두엔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30배 이상의 위력의 전략핵 W88(475㏏)을 장착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북한을 향해 ‘정권의 종말’을 경고했는데, 말만 아닌 걸 보여준 셈이 됐다. 이른바 핵억지력이다.
이를 보며 떠오른 건 영국의 SSBN인 트라이던트 잠수함(뱅가드급 잠수함으로도 불린다)과 그 금고에 보관된 ‘최후의 편지(letters of last resort)’다. 모두 네 척이 있는데, 각각의 금고에 영국 총리가 수기(手記)로 쓴 동일한 내용의 편지가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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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정상으론 최초 미SSBN 탑승
북 향해 "도발 시 정권 종말" 경고
'평화'만 외치는 민주당, 대안 뭔가
」
사연은 이렇다. 총리가 되면 곧 군 고위 관계자로부터 ‘특별한 보고’를 받는다고 한다. 트라이던트의 위력과 사용에 따른 여파다. 기습 핵 공격으로 다른 통신수단이 무용지물이 될 때(당연히 총리는 물론, 총리가 대행으로 지명한 인물도 숨진 상황이다), 트라이던트 잠수함 지휘관에게 어떤 지침을 줄지 결정하라는 요청도 받는다. 선택지도 주어지는데, 대충 다음과 같은 범주로 알려졌다. ▶보복하라 ▶보복하지 말라 ▶잠수함 지휘권을 동맹에 넘겨라 ▶호주 등 영연방 국가로 퇴각하라 ▶당신(잠수함 지휘관)에게 결정권을 맡기겠다 등이다. 이후 총리 홀로 결심하고 네 통의 편지를 쓴다. 이 과정을 잘 아는 인사는 “보복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총리는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 채로 결정해야 한다. 총리들은 이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권력의 심리학』)고 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가 총리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절절하게 느꼈던 것도 이 순간이었다고 한다. “나는 존 메이저(전임 총리)와 그가 취한 접근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 나름의 올바른 결정을 했다. 그런데도 잠수함 지휘관 중 한 명이 내 편지를 열어 봐야 하는 시나리오를 상상하면서 종이에 적힌 차가운 글자들을 응시했다. 내가 선택한 편지를 장교에게 전달하는 순간, 절대로 절대로 열리지 않기를 기도했던 봉투의 봉인이 떨어지면서 봉투가 열렸다. 부랴부랴 풀과 테이프를 가져와야 했다.”
영국이 왜 이런 절차를 마련했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물론 냉전이 배경이다. 이에 더해 소련과의 근접성 탓도 컸다. 핵 공격으로 벙커로 피할 시간도 없이 영국 정부가 사라질 수 있다고 봤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할 거냐, 이에 대한 영국 나름의 답변이 ‘최후의 편지’다. 총리가 바뀔 때마다 기존 편지는 밀봉된 채 폐기됐고 새 편지로 대체됐다.
대부분 총리는 자신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1970년대 후반의 총리였던 제임스 캘러헌이다. 그는 총리직에서 떠나고 30여 년 만에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핵무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상황까지 갔다면 나는 (핵무기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 버튼을 누르고도 살았다면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동당 출신의 그는 핵무기를 ‘악(evil)’으로 여겼고 ‘핵 없는 세상’을 바랐다. 그러나 핵억지력의 현실도 받아들였다. 핵 공격을 받으면 핵으로 보복할 것이란 믿음을 적에게 줘야 억지력이 생긴다는 걸 알았다. ‘보복하라’를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그의 노동당 후계자의 선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영국 정부 차원에선 큰 논란은 없다.
이처럼 지도자라면, 특히 권력자라면 도덕적 딜레마 속에서도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해가야 한다. 그게 책임지는 자세다. 윤 대통령이 핵잠수함에 오른 건 나름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제 궁금한 건 민주당이다. 북한이 핵 포기할 거라고 보장하며 “절대 전쟁은 안 된다”고만 말하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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