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떠나는 여행… 마음에 ‘쉼’을 얻다

김남중 2023. 7. 2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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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지역 출판사 대표들이 쓰는 ‘여름의 책, 그리고 로컬’ (상)
강원도 고성군의 유일한 출판사인 온다프레스 박대우 대표가 찍은 아야진 바닷가 모습. 박 대표는 온다프레스의 SNS 계정에 책 소식과 함께 고성의 풍경 사진을 올린다. 온다프레스 제공


여름휴가에 ‘독서의 시간’을 끼워넣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지역 출판사들에게 책 추천을 부탁했다. 지역에 터를 잡고 지역 작가들과 협력하며 좋은 책들을 만드는 출판사들이다. 여름휴가는 도시 사람들이 오랜만에 지방을 만나는 ‘로컬의 시간’이기도 하다. 지역 출판사 대표 6명이 쓰는 ‘여름의 책, 그리고 로컬’ 이야기를 2회에 나눠 싣는다.

위원석 딸기책방(경기도 강화) 대표

얼마나 기다렸던 여름방학인가. 학원도 다니지 않고 게임도 없던 시절이니 시간이 차고 넘쳤을 것 같지만, 해가 지도록 동네를 뛰어놀다 보면 하루는 언제나 짧았고 시간은 늘 모자랐다. 골목에서 시끌벅적 깡통차기를 하다가 어른들 호통 소리에 쫓겨 학교 운동장에 갔다. 공차기며 다방구, 오징어게임을 하고 그것도 지겨워지면 뒷산에 올라 어둑해질 때까지 전쟁놀이를 했다.


내가 흥분과 야만으로 가득 찬 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 해원이에게는 난생처음 가슴 뛰는 이성 친구가 생겼다. 이윤희 작가의 ‘열세 살의 여름’(창비)은 나와는 아주 다른 방학을 보냈던 해원이와 친구들의 일상과 마음결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만화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육 학년 사춘기의 내 모습, 내 곁에 있어 줬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어른이 읽어도 아이가 보아도 재미와 감동을 느낄 작품이다.


열세 살의 해원이보다 격렬하게 사춘기의 풍랑 한가운데를 항해 중인 열다섯 살의 두희도 있다. 국무영 작가가 쓰고 그린 두 권의 만화 ‘똥두’(비룡소)는 스스로가 못마땅한 중학생 동두희의 힘겹고 아프고 요란한 성장을 그려낸다. 까칠한 두희를 마주하면 까맣게 잊고 지내던 10대 시절의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나는 왜 지금의 나일까?’ ‘왜 더 잘생긴 내가 아닌 거지?’ ‘왜 부잣집 아이인 내가 아닌 거지?’ 두희처럼 아리고 쓰린 성장통을 겪고 있을 청소년들과 함께 읽다 보면 내가 건너온 아득한 시절의 상처들을 만나기도 한다.

해 질 녘이 되어 돌아온 집, 저녁을 먹고 나면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네 남매가 오십원, 백원씩 모아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빌려다 보았다.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성인이 되자 어릴 때 좋아했던 것들을 머릿속 한구석에 버려두었다. 삼십년이 지나서야 어린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지막한 동산, 친구 집 초인종을 만날 수 있는 곳 강화읍 관청리 골목을 걸어 보라. 출출할 땐 정통분식에서 떡볶이를 먹고, 배가 차면 성공회성당에서 멍때리자. 멋진 하루에 감사!

박대우 온다프레스(강원도 고성) 대표

우리 출판사가 있는 강원도 고성 아야진은 근래 들어 무척 각광받는 여행지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북적하다. 친지의 방문이 겹칠 때면 더더욱 어수선해져 이 아름다운 휴양지를 떠나 차라리 도시로 바캉스를 떠나야 하나, 말 그대로 ‘웃픈’ 고민에 빠진다.


특히나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같은 전시 소식을 들을 때면 더더욱 서울행이 간절해지지만 일이 잔뜩 밀려 언감생심일 뿐이다. 그래픽노블 ‘에드워드 호퍼’(이유출판)로 애써 마음을 다스린다. 사실 이 책이 가진 다른 어떤 장점들보다, 호퍼의 아내 조세핀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이 책의 특장점으로 꼽고 싶다. 조세핀의 사생활은 남편 호퍼에 철저히 맞춰졌고 이로써 그녀의 예술세계는 막을 내린다. 이전에는 그저 호퍼의 그림 속 모델로서만 알고 있던 조세핀의 내면을 들여다본 뒤로는 호퍼의 그림이 더욱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서늘하다 못해 저릿하다.


여행을 떠나지 못할 때에 내가 또 하나 꺼내드는 것은 철 지난 어학 교재들이다. 이런 외국어 공부가 의외로 방랑벽을 다스려주는데, 작가 곽미성도 나와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어떤책)는 곽 작가의 외국어 학습기다. 작가는 20여 년간 프랑스에 살아온 한국인으로, 그동안 종종 들렀던 이탈리아를 동경하며 그 나라 언어를 본격적으로 배워보기로 한다. 여러 굴욕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만들고 나서 그가 이탈리아 현지로 일주일 어학연수를 떠나는데, 그 부분이 꽤 인상적이다. 작가는 본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타국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의 여유를 통해 본인이 왜 이 언어를 배우려고 했는지를 깨닫는다. 그 이유는 바로 “저 햇살 아래의 여유를 찾고 싶은 마음 같은 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그러고는 “다들 마음에 품고 사는 다른 나라 하나쯤 있지 않냐”고 물으니, 나는 그저 오래전에 서가에 넣어둔 어학 공부 자료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정미 이유출판(충남 대전) 공동대표

휴가는 지금 여기를 떠나면서 시작된다. 어디로 가든 일상을 벗어나는 게 요점이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휴가지도 엇비슷한 일상이 펼쳐진다. 산과 바다를 배경 삼아 잠시 쉬다 오면 그만이지 싶겠으나 기왕이면 그곳의 일상에도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우리나라에는 3300개 넘는 섬이 있다.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 밤이면 무수한 별이 쏟아지는 환상의 장소일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에겐 육지에 닿는 배가 하루에 한두 번 뜨고 거센 바람과 파도에 맞서야 하는 고달픈 터전이기도 하다. 이런 섬마을을 살고 싶은 섬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어딘가에는 살고 싶은 바다, 섬마을이 있다’(남해의봄날)는 미술관이 된 연홍도, 관광명소가 된 반월·박지도, 순례자 길의 기점이 된 소악도 등 다도해 섬을 주민과 함께 가꾸는 섬마을 기획자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골살이, 오늘도 균형’(차츰)은 이십 대부터 슬로라이프를 꿈꾸던 11년 차 귀농 부부가 쓴 책이다. 저자는 농학을 전공하고 해외 취업에 성공해 캘리포니아에서 곡물 유통 관련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할 수 없는 구조에 의문이 생겨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 시골살이를 결심한다. 충남 논산 연무읍에서 제철 채소의 참맛을 소비자에게 전하기 위해 3일은 농사를 짓고 3일은 식당을 운영하며 삶의 균형을 맞춘다. 이들이 귀농을 결심한 이유가 자신들의 속도에 맞는, 대안적인 삶을 찾기 위해서라는데 지나는 길이라면 잠깐 들러야 하지 않을까.

대전은 전국 어디에서든 중간쯤 쉬어 가기 좋은 곳이다. 원도심 지킴이 성심당에서 빵만 챙겨가지 말고 성심당 문화원도 방문해보자. 환경문제를 의식하며 카페와 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맞은 편엔 독립서점 ‘다다르다’도 있다. 여행을 주제로 2011년에 문을 연 이곳은 ‘영수증 일기’로도 유명하다. 영수증에 서점주인이 쓴 일기가 출력돼 나온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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