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정가판매 강제·가격할인 제한 '도서정가제' 합헌"
책을 판매하는 사람에게 정가로 판매할 의무를 부과하고, 가격 할인의 폭을 제한한 도서정가제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처음 나왔다.
헌재는 20일 간행물을 판매하는 자가 정가대로 판매하도록 정한 출판문화산업 진흥법(이하 출판법) 제22조 4항과 가격 할인의 범위를 제한한 같은 조 5항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 사건에서 평의에 참여한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각(합헌) 결정했다.
출판법 제22조 1항은 '출판사가 판매를 목적으로 간행물을 발행할 때에는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가격(정가)을 정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간행물에 표시하여야 한다'고 정가 표시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같은 조 2항은 '발행일부터 12개월이 지난 간행물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정가를 변경할 수 있다'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정가를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한편 이번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이 된 출판법 제22조 4항은 '간행물을 판매하는 자는 이를 정가대로 판매하여야 한다'는 조항이고, 같은 조 5항은 '4항에도 불구하고 간행물을 판매하는 자는 독서 진흥과 소비자 보호를 위하여 정가의 15퍼센트 이내에서 가격할인과 경제상의 이익을 자유롭게 조합하여 판매할 수 있다. 이 경우 가격할인은 10퍼센트 이내로 하여야 한다'는 조항이다. 두 조항 모두 2014년에 신설됐다.
헌법소원을 청구한 문모씨는 전자책 작가로서 전자책을 발간·유통하는 1인 출판사와 온라인 전자책 서비스 플랫폼 업체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예비 간행물 판매업자였다. 문씨는 출판법상 도서정가제를 규정한 이들 조항 때문에 일단 책의 가격을 정하고 난 뒤에는 가격 할인 등의 방법으로 즉시 마케팅 수요에 대처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하는 등 기본권이 침해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문씨는 해당 조항들은 다른 시장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격 할인 금지를 도서에만 적용함으로써 직업의 자유와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또 간행물과 예술작품은 본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간행물의 경우에만 합리적 이유 없이 가격 할인을 금지하므로 평등원칙에도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현행 출판법상 도서정가제는 과도한 가격 할인 경쟁을 막기 위해 정가의 10%까지, 마일리지 등을 포함해서는 최대 15%까지만 할인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둔 제도다. 헌재는 먼저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연혁적 배경을 살폈다. 헌재는 "도서정가제는 공정거래법상 금지되는 재판매가격유지행위가 출판법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고 밝혔다. 공정거래법에서는 가령 사업주가 대리점에 제품의 판매가격을 미리 정해주고 이를 유지하도록 하는 행위가 공정한 거래를 해친다고 보고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책의 경우 이 같은 판매가격 유지 행위가 법에 의해 강제되고 있다는 의미다.
헌재는 "1970년대부터 출판사들의 사업자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의회와 서적판매상들의 사업자단체인 한국서점조합연합회 사이의 계약에 의한 상관행으로서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있었고, 당시 공정거래법령은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재판매가격유지행위로서 도서정가제를 인정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1990년대 이후 대형할인매장, 온라인서점들의 서적에 대한 할인판매가 실시되며 가격경쟁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자 출판계는 공정거래법에 의한 예외적인 재판매가격유지행위의 허용에서 나아가 그 시행을 담보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다"라며 "이에 2002년 8월 '출판 및 인쇄진흥법'이 제정돼 현행과 같은 골격의 도서정가제가 도입됐다"고 밝혔다.
헌재는 문씨의 나머지 기본권에 대한 침해 주장은 직업의 자유가 침해됐는지에 대한 판단으로 충분하다고 보고, 해당 조항이 과잉금지의 원칙(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적합성, 최소 침해성, 법익 균형성)에 반해 청구인의 직업의 자유를 침해하는지를 따졌다. 헌재는 "지나친 가격경쟁으로 인한 간행물 유통질서의 혼란을 방지함으로써 저자와 출판사를 안정적으로 보호 육성하며, 다양한 서점 또는 플랫폼을 유지·장려해 소비자인 독자의 도서접근권을 확대하고,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의 간행물을 제공함으로써 출판산업과 독서문화가 상호작용해 선순환하는 출판문화산업 생태계를 보호·조성하려는 이 사건 심판대상조항의 입법목적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또 헌재는 이 같은 입법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한 수단이라고 봤다. 헌재는 "이 사건 심판대상조항의 시행 이후 종이책의 매출이 감소하고 지역서점의 매장 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라면서도 "그러나 이는 인터넷의 발달과 같은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가 초래한 결과로 볼 여지가 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이 사건 심판대상조항과 같은 독과점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없었다면 이와 같은 현상이 더욱 가속화됐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종이출판물 시장에서 자본력, 협상력 등의 차이를 그대로 방임할 경우 지역서점과 중소형출판사 등이 현저히 위축되거나 도태될 개연성이 매우 높고,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적 다양성 축소로 이어지므로 가격할인 등을 제한하는 입법자의 판단은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헌재는 "전자출판물의 경우 종이출판물과 구분되는 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데, 전자출판물에 대해서만 이 사건 심판대상조항을 적용하지 않을 경우 종이출판산업이 쇠퇴하고 그로 인해 양자의 상호보완적 관계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게 될 우려가 있다"라며 "또한 전자출판물 시장에서도 소수의 대형플랫폼이 경제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할 필요성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밝혔다.
또 헌재는 해당 조항 때문에 책의 판매 가격을 자유롭게 정할 수 없는 기본권 제한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비가격적 서비스경쟁을 할 수 있어 제한의 정도가 크지 않다고 봤다. 반면 지식문화 상품인 간행물에 관한 소비자의 후생이 단순히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이득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의 간행물을 선택할 권리 및 간행물을 선택함에 있어 필요한 지식 및 정보를 용이하게 제공받을 권리도 포괄하기 때문에 법익 균형성도 갖췄다고 판단했다.
헌재 관계자는 "도서정가제를 정한 출판법 규정이 간행물 판매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여부에 관해 판단한 첫 사례"라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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