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3일천하'의 전말
[김삼웅 기자]
▲ 갑신정변 전에 찍은 개화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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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에서 '3일천하'는 안타깝고 아쉬운 대명사가 되었다. 〈14개 정강〉이나 신정부 조각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때 개혁파가 패배하지 않고 국정개혁을 추진하였다면 우리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터이다.
지도자의 순간적인 판단 잘못이 역사의 큰 흐름을 역류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옥균은 고종의 문안을 이유로 심상훈의 입궐을 허용하였다. 이미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착각하고 베푼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5일에 전 경기감사 심상훈이 국왕 문안의 명목으로 입궐하여, 원세개와 민비의 사이에 내통한 결과가 되었지만, 그의 입궐을 허락한 것은 개화파, 특히 김옥균의 큰 실책이었다. 원세개는 청군 출병의 구실로 전 우의정 심순택에게 그 출동을 요청하게 하고, 오후 3시 500명이 일대는 오도유(吳兆有)의 지휘하에 선인문으로부터, 800명의 다른 일대는 원세개의 지휘 하에 돈화문에서부터, 각각 창덕궁으로 공격해왔다.
평소에 청군을 비웃고 호언장담하던 죽첨(竹添)은 일본군의 철수를 명하고, 민비는 청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전세는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신복모·윤경완 등이 지휘하는 사관학생, 개화파 장사 및 일부 전영(前營) 병사 100여 명은, 탄환이 발사되지 않는 총검을 들고 분투하였지만, 국왕까지도 개화파로부터 떠나 민비에게로 갈 것을 고집하였다. (주석 21)
개화파는 개혁에 대한 열정은 투철하지만 단순한 편인데 비해 수구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교활했다. 이들은 오랜 세월 권력을 유지하면서, 이를 지속하는 노하우를 체득하고 있었다. 위기국면이면 그들의 두뇌는 훨씬 민첩하게 움직인다.
이때 밖에서는 국왕 일행이 계동궁에서 창덕궁으로 환궁할 때 궁외로 탈출해 나간 전 경기감사 심상훈에 의하여 정변의 진상을 알고 놀란 민가 일파 잔당들은 곧 원세개와 결탁하고 개화파 정부를 타도할 음모를 급속히 꾸미고 있었다.
청장 원세개의 지휘하에 민가 일파 잔당들은 한편으로는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파들이 일본공사와 밀모하고 일본인들의 손을 빌어 국왕과 왕비, 주요 대신들을 전부 죽이고 서왕자(庶王子) 의화군 강(義和君 堈)을 새 왕위에 올려 앉혔다는 유언을 날조하여 유포시킴으로써 인심을 더욱 소동시켜 개화파들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으려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 우의정 심순택을 시켜 민가 일파 정부를 대표하여 원세개, 오조유 등에게 정식으로 청군의 출동을 '요청'케 하는 음모를 꾸미었다. (주석 22)
김옥균 등이 신정부의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구체적 실행방법을 논의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 이들을 타도할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구세력은 독자적으로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거침없이 외세를 불러들였다. '외적보다 내변'을 두려워하는 사대주의의 발로였다.
10월 19일 오후 3시경 원세개는 약 800명의 청군을 이끌고 선인문 방면으로부터 침범해 왔고 오조유는 약 500명의 청군을 이끌고 북문 방면으로 우회하여 비원 일대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전투는 공격하여 오는 원세개의 청군과 선인문 방면을 수비하고 있던 전·후영 조선 병사들과의 사이에서 개시되었다. 당시 전·후영 병사들은 일시 박영효의 지도하에 신복모 등 개화파들에 의하여 훈련을 받았던 군인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었던 데서 개화파들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영문에서 총을 수리하고 소제하는 일이 채 끝나지 않고 있던 관계로 많은 병사들은 겨우 총창과 맨주먹만 들고 있다가 전투에 진입한 데서 청군의 공격이 격렬하여지자 곧 혼란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신복모, 윤경완 등이 인솔한 개화파 직계의 약 100명의 군대들이 주로 우세한 청군과의 전투를 하게 되었다. (주석 23)
중과부적, 개화파는 제대로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밀리고, 왕궁 방어의 책임을 맡았던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재빨리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처음부터 청국군이 1,500명인데 비해 일본군은 150명 수준이어서 전력에 차이가 컸다. 이를 간파한 일본측은 청국이 개입하지 않을 지 모른다는 기대와, 여차하면 빠져 나간다는 전략이었다.
이와 같은 실정과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 개화파의 전략 미숙이, 결국 갑신정변의 좌절과 개화세력의 패배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왕궁에서 개혁파의 경호책임을 맡았던 서재필의 기록에서 참담했던 정황을 찾게된다.
이때 나는 아무리 짧은 동안이나마 자기에게 지휘권이 있는 이상 그대로 부하를 해칠 수도 없어 최후의 일전으로 운명을 결정하려고 하였다. 부하 병사들로 말하면 그 기개로나, 식견으로나, 기술로나, 그 당시 세계의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못지 않은 정용(精勇)한 군인들이었다. 청군에게 대하여 전투의 명령을 내리자, 한 사람이 천을 당할만한 기세를 가졌다.
우선 선인문(宣人門)으로 들어오는 청병에 대하여 처음에는 기왓장으로 싸우다가 될 수 있는대로 탄환을 아끼면서 탄환에 맞아 쓰러지는 적병이 상당히 다수에 달하였을 뿐더러 그들은 뜰 가운에 우물 속으로, 혹은 바위 틈에 숨어버리기도 하며, 혹은 문 외로 탈출하기도 하고, 혹은 송림 속으로 도피하기도 하였다.
청병은 군기도 모두 구식일뿐더러 군인의 정신이 이미 부패하여 총을 쏜대야 공중을 향하여 공폭만 터질 뿐이므로 하나도 전투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쪽의 병 수는 전영병까지 합하여 약 150명, 일본 병사가 14인 가량인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1,500이나 되는 청병과 항의한다는 것은 숫자상으로 이미 승부가 판단된 일이다. 그런 데다가 한 사람, 두 사람씩 도망하여 도리어 청병에 가담해 버리는 자가 있어 우리 파의 기세가 시시각각으로 불리하게 되었다. (주석 24)
주석
21> 강재언, 앞의 책, 105쪽.
22> 이나영, <갑신정변>, <김옥균>(북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183쪽.
23> 앞의 책, 184쪽.
24> <서재필박사 자서전>, 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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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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