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금융사]美 철도사업의 전설이 된 유대계 은행가 시프

2023. 7. 2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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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이주해 은행가로 성공
금융 혁신해 철도 완성
모건과 경쟁하다 지주사 설립
거대한 철도 네트워크 만들어

JP 모건과 함께 월스트리트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제이컵 시프는 업계 2위 투자회사를 운영했다. JP모건은 다양한 분야에 투자한 반면, 시프는 철도에 집중했다. 그는 20세기 초 다양한 대륙횡단 노선을 재편했고, 철도채권 모두를 판매했다. 시프는 독일 로스차일드 가문 중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으로 이주해 마침내 가업인 은행가로 성공했다. 당시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지 못한 미국은 시프와 같은 이민자들이 중개한 유럽 금융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모건과 달리 유대인이었던 시프는 월스트리트에서 유대계 금융세계를 대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로스차일드 가문과 인연 덕분에 유럽은행과의 인맥이 화려했다. 유럽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유럽은행가와 동맹을 맺었다. 철도에 집중 투자한 시프는 어렵지 않게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프는 채권을 판매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철도 사업을 배웠다. 그는 이사회에서 자리를 얻거나 재정 문제를 감독하는 경영진의 고문으로 재직했다. 그는 철도의 경로를 여행하고 장비를 연구하고, 시장경쟁을 예측했다. 그는 모든 투자가 적절하게 관리되도록 하기 위해, 추구하는 모든 투자에 대해 동일한 전술을 실행했다. 시프는 고객의 투자를 신중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유럽 투자자들은 유럽 벤처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는 미국 투자를 선호했다.

그 결과 시프는 미국 기업, 특히 철도건설을 위한 확장, 개선 및 운영 비용을 조달할 수 있었다. 시프는 항상 독일과 강력한 가족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런던이나 함부르크에 기반을 둔 은행이나 한자동맹과도 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871년 독일은 비스마르크 총리 아래 하나의 국가로 통합한다. 시프는 뉴욕시에서 독일 이민자들 사이에서 살면서 독일과의 끈을 유지했다. 미국 철도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은행과 동맹을 맺었다. 1904년까지 철도 투자 규모는 미국의 다른 모든 상업 투자 형태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시프는 초국가적 관점에서 금융을 혁신해 철도를 완성해 갔다. 한때 ‘노던 레일로드’의 경영권을 놓고 모건과 다투기도 했지만, 시프와 모건은 공동으로 경영하는 지주회사를 만들기로 타협한다. 그 이후 JP 모건은 시프를 유일한 맞상대로 인정했다. 철도기반 시설의 완성으로 미국은 세계 최고의 산업 경제로 변모해 갔다. 미국의 성장 산업 중에서 철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선두주자였다.

186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까지 철강, 석탄, 철도, 토목 공학 및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미국 경제 엔진을 이끌었다. 시프는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의 네트워크에서의 경험을 활용했다. 그는 기존 연락처를 은행 사업에 활용했고, 부지런히 인맥을 개발하고 확장했다. 그는 멕시코의 사업가를 소개받아 멕시코 은행도 설립한다. 그 인연으로 1906년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채권 마케팅을 함께 한다.

19세기 이리 운하 프로젝트는 뉴욕시를 금융 및 무역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킨다. 당시 서부 확장, 산업화 및 광업은 철도의 수익을 약속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억눌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철도는 선로를 깔고 장비를 구입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했다. 채권 발행은 재정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높은 투자 수익률을 원하는 유럽인들은 빠르게 발전하는 미국을 바라보며 신흥 경제국을 선택했다. 대륙 횡단 철도 회사들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서부는 인구가 적고 무역과 탑승객이 철도를 수익성 있게 만들기에 충분한지 여부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막대한 위험을 수반했다.

도처에서 철도 사업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들의 관리자가 항상 재정적으로 신중한 것은 아니었다. 적시에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철도 회사는 보험에 의존해 부채에 대한 시장의 위험을 떠맡았다. 부채 발행이 여의치 않으면 증권을 직접 구매하고 미래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 모든 위험을 관리하고, 거대한 철도네트워크를 만들어낸 것이 오롯이 시프의 공이다. 시프의 회사 쿤엔롭은 이러한 시장 불확실성을 저글링했다. 때때로 회사는 기꺼이 부채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때에는 그것들을 사서 나중에 기회가 허락될 때, 때로는 낮은 가격으로 내놓아야 했다. 그래서 쿤엔롭은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채무 증서를 발행했다.

다른 경우에 회사는 신디케이트의 다른 은행에 합류해 부채 발행을 제안하고 이익과 위험을 공유했다. 이러한 활동은 회사가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적절한 현금 유동성을 유지하도록 요구했다. 시프가 이 분야에 진입했을 때 신디케이트는 부채 상품을 판매하는 비교적 새로운 방법이었다. 시프가 1870년에 독일 투자자 신디케이트에 북태평양 철도 증권을 맡겼기 때문에 독일 신디케이트가 미국 신디케이트보다 앞섰다. 미국 최초의 인수 신디케이트는 1871년이었다.

시프의 또 다른 면모는 ‘일본은행가’이다. 러일 분쟁 초기에 시프는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만났다. 그는 이후 자신의 회사인 쿤엔롭를 통해 러일전쟁 전비로 쓰라고 2억달러까지 신디케이트로 일본에 대출해준다. 거의 모든 은행으로부터 거절당한 후,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다. 전시 자금 조달 덕분에 시프는 일본 황궁에서 식사를 한 최초의 외국 민간 시민이 됐다. 평생 동안 그는 수많은 정부와 기업에 대한 대출을 관리했다. 박애주의자로서 그는 독일-유대인의 공공복지 전통을 이어갔다. 모든 인종과 종교에 봉사하는 미국의 시민, 교육 기관에 대한 기부를 통해 충성스러운 시민임을 증명했다. 그렇지만 JP모건처럼 시프도 월스트리트 은행가와 철도가 대중의 분노를 샀던 진보 시대에 대중에게 인정을 받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자선 활동을 최소한 다음 세대까지 계속하도록 가족을 설득했지만. 자신의 리더십이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물려줄 수 없었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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