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도덕적 붕괴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정직 신뢰 등의 덕목이 구시대 유물처럼 돼
도덕성 쇠퇴 현상으로 믿지만 동시대 도덕성 수준은 유사해
이런 왜곡된 인식은 구성원 간 상호작용에 부정적 영향 미쳐
따라서 언론과 SNS 유저들은 선정적 사건 사고보다
사회의 긍정적 측면 소개하는 콘텐츠 생산 공유에 노력 기울였으면
지난주부터 예측이 쉽지 않은 국지성 집중호우가 이어지면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 정치, 경제, 국제 정세 등 사회 전반에서 들려오는 온갖 우울한 소식에다 최근 이상기후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들려오는 폭염과 홍수 피해 소식이 더해지면서 ‘말세’라는 단어를 주변에서 자주 접한다. 그리고 도덕성의 몰락이 말세의 원인이라는 지적 또한 자주 듣는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패륜 범죄 소식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 소식 그리고 폭력물과 음란물이 넘쳐나는 미디어를 접하다 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정직함, 공손함, 상호 신뢰 등 사회 구성원에게 요구됐던 덕목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 인간 생애의 짧은 시간 동안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도덕적 쇠퇴를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사회의 도덕성이 급속히 몰락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달 최고의 권위를 지닌 국제학술지인 네이처에 실린 ‘도덕적 쇠퇴에 대한 환상’이라는 주제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70년간 60개국을 대상으로 관찰한 결과, 모든 국가에서 인종, 성별, 나이, 정치적 이념, 학력에 상관없이 자신이 태어난 이후 도덕성이 쇠퇴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질문들을 통해 동시대의 도덕성 수준을 10년 간격으로 평가하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유사한 수준을 보인다. 한편 도덕적으로 쇠퇴하는 세태에서도 자신은 도덕적이라고 믿는다.
도덕적 쇠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두 가지의 심리학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편향된 노출 효과’다. 인간은 타인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심리가 강하다. 미디어는 이를 자극하기 위해 인간의 부적절한 행동에 초점을 맞춘 콘텐츠를 확대해서 생산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편향된 기억 효과’다.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이 빨리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며,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긍정적으로 포장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록을 살펴봐도 정복, 학살, 살인, 강간과 같은 극도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수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물론 객관적인 수치는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에 비해 현대인들이 더 선하고 정직하며 친절하지 않다면 극도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수치도 줄어들기 힘들 것이다. 2000여년 전 로마시대의 역사가 리비우스도, 춘추시대의 공자도 사회의 타락상을 지적하며 도덕성 회복을 강조했듯이 시대를 막론하고 도덕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인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문명적이고 도덕적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문제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다는 대중의 인식은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자신만이 도덕적이라는 대중의 착각은 가짜 뉴스를 매개로 하는 악의적인 선동에 취약한 사회를 만들 수 있고, 선동에 의한 분열과 갈등은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킬 것이다.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2015년 76%에 이르는 미국 국민 대다수가 국가의 도덕적 붕괴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 국정 과제가 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 조사 결과는 그 이듬해 대선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외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언론과 방송 그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자들은 선정적인 사건과 사고만 다루지 말고, 사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지난주 한 방송사 뉴스에 ‘아름다운 재회’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인연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난해 중국 쓰촨성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폐허 속에서 한 어린이의 목숨을 구한 소방관은 14년 전 쓰촨 대지진 때 폐허 속에서 생존자를 구조하던 한 소방관을 맘속에 영웅으로 새기고 소방관을 꿈꾸었던 소년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구한 아이의 아버지가 바로 이 소방관이 맘속에 영웅으로 새겼던 그 소방관이었던 것이다. 대물림되는 은혜의 인연이 신비롭기만 했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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