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무기", 북한 바꿔낼 야망있는 여성의 탄생
[이혁진 기자]
지난 15일 서울시 강서구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남북작가 북콘서트'가 열렸다. 이곳 남북통합문화센터는 북한이탈주민과 일반주민이 문화를 통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이루자는 취지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공간이다.
이날은 설송아 탈북작가의 장편소설 <태양을 훔친 여자>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콘서트는 아코디언 축하연주에 이어, 배우가 소설의 인상적인 대목을 낭독하는 형식을 가미해 눈길을 끌었다. 말미에는 남한작가가 북한작가에 질문하는 시간도 있었다. 책을 출간하면 저자와 몇몇 지인들이 식당에서 자축하는 분위기가 보통인데, 이번 북콘서트는 남북통합을 주제로 한 우수 문화콘텐츠 지원사업답게 짜임새 있게 진행됐다.
▲ 남북작가북콘서트 현장, 오른쪽이 설송아 작가 |
ⓒ 이혁진 |
평안남도 순천 태생인 설송아 작가(본명은 최설)는 2011년 남한에 입국한 12년 차 북한이탈주민 3세다. 아버지는 1960년대 중국에서 공부하고 북한으로 이주한, 당시로서는 북한에서 드문 지성인이었다. 작가는 고난의 행군 이후 열린 장마당시대는 북한 출신성분제 사회에서 특히 여성들이 신분을 상승시킬 기회였으며 이들의 모든 활동과 기록을 역사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배경에서 소설 <태양을 훔친 여자>가 탄생했다.
책 제목 <태양을 훔친 여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세대 지도자를 태양으로 신격화하고 이를 세뇌시키는 사회이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아 3백만 명(추정)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급기야 북한성분제도는 무너지고 있다. '태양을 훔친 여자'는 여성이 국가기능시스템인 성분사회제도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도전적인 여성'을 상징한다.
소설은 주인공 봄순이 1995년부터 자신이 억압당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감옥생활과 딸 미애 등 일부 내용은 간접 체험을 도입했지만 주유소 운영, 아파트 분양 등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었다.
북한 여성의 삶과 애환을 담은 자전적 소설
2011년 남한에 입국한 설 작가는 자신이 아마추어 작가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그에 따르면 작가의 꿈은 고난의 행군이 끝나가던 1998년, 20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끌고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쌀 마대마다 쓰인 대한민국을 보면서 작가는 북한주민으로서 무척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소설은 북한에서 '돈주'가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돈주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우리말로 이는 돈이 많은 부자, 즉 북한 신흥 부자를 뜻한다. 장마당시대에 돈주의 생리는 정경유착으로도 이어진다. 돈이면 성분도 개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돈의 위력은 권력기관의 남자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주인공 봄순은 당이 발행하는 공채를 무더기로 사들여 표창을 받고, 입지전적으로 당 간부에 올라 성분제도를 타파한다.
소설에서는 '달러'를 숨기는 노하우 또한 소개돼 흥미롭다. 봄순은 달러 뭉치를 김일성 초상화 뒤 금고에 숨겼다. 고기를 먹어도 안 먹은 척해야 하는 북한에서, 신격화된 김일성 초상화 뒤는 돈을 숨길만한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것이다. 돈주들의 경험이지만 이를 두고 "수령이 달러에 밀려났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도 한다.
▲ 서울 강서구 소재 남북통합문화센터 |
ⓒ 이혁진 |
태양을 훔친 여자 소설 속 주인공 봄순은 북한이 강요하는 여성상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식량 배급제가 무너진 북한사회에서 장마당에 나선 여성들은, 국영공장에서 근무하는 남편 한 달 월급을 하루 만에 번다. 여기서 남성들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여성들과 충돌한다.
여성 면모를 강조하는 치마 복장 강요, 가정불화가 자전거 타는 여성 탓이라며 여성들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 담배 피우거나 술 마시는 여성 등에 대한 편견과 멸시 등 남성들이 조장한 풍조들은 지금 거의 용도폐기 수준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작가는 이어 "남한 독자들은 워너비 같은 봄순의 강인한 삶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고, 북한 여성들이 만약 실제 이 책을 본다면 자기 삶을 닮았다고 공감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출신성분을 쟁취하는 봄순이의 고단한 삶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북콘서트를 함께 진행한 설 작가의 멘토 윤여경 작가는 "스토리컨설턴트 입장에서 이 소설을 '디아스포라 소설' 반열에 올리고 싶다"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어 "'봄순'이라는 강인한 여성 캐릭터는 박경리 소설 '토지'의 주인공 서희를 연상시킬 정도로 멋지고 인상적이다"라고 말했다. 봄순이는 북한 스토리에만 머물 인물이 아니라 전 세계 디아스포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라는 설명이다.
요컨대 봄순은 북한성분사회의 역경을 헤쳐 가며 강인한 여성의 삶을 추구한다. 요즘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MZ세대에게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봄순의 역동성이 주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평가이다. 봄순이 같은 강인한 캐릭터는 SF소설이나 판타지를 좋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어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 줄곧 관통하는 메시지는 아래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시대가 또 한 번 변화하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었다. 또다시 사회가 자본주의 과도기에 진입한 것이었다. 봄순의 야망은 한 단계 더 커졌다. '권력을 가져야 한다.' 평범한 돈주는 정부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 돼지는 키워서 잡아먹는 게 이 나라의 정치수법이 아닌가.
봄순은 이제 권력이 절실해졌다. 십만 달러를 가지고 있는 돈주의 위상보다 무일푼 간부의 위상이 아직은 훨씬 안전하고 높음을 알았다. 이는 성분제도가 사회의 근간을 움직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또 권력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져야 할 무기라는 것도 깨달았다. '성분을 개조하자. 이 사회의 성분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몇 번이고 봄순은 이 말을 되풀이했다." ('태양을 훔친 여자' 267쪽)
북한 여성들 정신건강 보살피고 싶다는 작가
작가에 따르면 북한의 시장경제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천민자본주의로서 특권층에게 부가 집중되고 부조리가 마피아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 봄순은 개인소유권을 인정하는 시장경제 길목에서 분투하는 인물이다. 나아가 여성의 저력이야말로 현재 북한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 강조했다.
남한작가들의 북한작가에 대한 기대와 주문도 이어졌다. 북한의 '단일사상'을 독자들이 얼마큼 반응할 것인가에 대해 북한 스토리를 지구촌 입장에서 글로벌 시각이 중요하며 이에 대한 출판계와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통일부가 협력차원에서 남한작가 멘토를 통해, 북한 작가의 북한 에피소드를 SF나 판타지 분야로 써볼 것을 조언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이런 바람들이 현실적으로 추진된다면 'K문학'의 미래는 더욱 밝을 것으로 전망된다.
남한에 정착해 비교적 짧은 기간에 북한학 박사를 따고 장편소설을 쓰기까지, 설 작가의 행보는 소설 속 직접 그린 '봄순'이처럼 거침이 없어 보인다.
▲ 남북작가북콘서트 축하 아코디언 연주 |
ⓒ 이혁진 |
이번 북콘서트는 가까이는 탈북민, 나아가서는 북한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스토리의 힘'이 새삼 중요하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자리였다. 한편 필자는 이 소설에서 또 눈여겨볼 부분은 북한 사투리와 북한 말이라 생각한다.
소설 속 몇 가지 자주 쓰이는 사투리를 인용하면 죽신하게(흐뭇할 정도로), 베베해서(어리바리해서), 일떠세운(기운차게 일어서게 하는), 도리머리(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싫다는 뜻), 걸탐스레(의욕이 강하게) 등이다. 이러한 북한의 생생한 사투리와 말들은 소설을 보다 감칠맛 나게 한다. 북한 사투리 연구는 남북한 언어연구에도 일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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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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