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걱턱과 단명, 근친혼이 불러온 가문의 저주
[이준목 기자]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운명이다.'
스위스 북부시골의 가난한 백작 가문에서 출발하여 유럽과 세계의 패자로 떠오른 '합스부르크(Haus Habsburg) 가문'의 전성기 위세를 대표하는 수식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600여년간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명문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을 대표하는 황실 가문으로 자리잡았고 수많은 군주와 고위 귀족들을 배출하며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린 것으로 유명하다.
20세기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군주정의 몰락, 민주주의 공화국의 발전 속에 합스부르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명가였던 합스부르크가 몰락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이나 외적의 침입같은 외부적인 문제보다도 수백 년간 반복된 '근친혼'으로 인정한 유전병이 가장 크게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 tvN |
7월 1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근친혼의 저주, 세계를 제패한 합스부르크 가문' 편을 통하여 유럽의 역사를 주도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흥망성쇠를 조명했다. 문예학자인 라영균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통변역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선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0-11세기 경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출발점은 스위스 알프스 산맥 인근의 아르가우 지역이었고, 이때만 해도 인근의 다른 가문들보다도 규모가 영세한 말단 시골 귀족 가문에 불과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신성로마제국(962-1086)의 영역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지금의 독일 일대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영토의 일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여러 공국과 제후, 영주들이 봉건적 위계질서를 형성한 국가 연합체였다.
12-13세기에 접어들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급상승했다. 합스부르크는 알프스 산악과 평원 지대가 교차하는 지형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영지를 지나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받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정치감각이 탁월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력한 제후와 성직자들의 입김이 강하여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연방체제에서 황제의 편에 서서 정적들과 맞섰고, 황실 및 명문가들과의 정략 결혼을 통하여 유력가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1273년, 합스부르크는 가문 최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루돌프 1세(1218-1291)를 배출하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루돌프 1세가 즉위하기전 신성로마제국은 20여년간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 된 대공위 시대(1254-1273)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황제투표권이 있는 가문과 교회는 서로를 견제하느라 새 황제를 선출하는데 눈치만 보기 바빴다. 제국을 대표할 정치적인 지도자가 부재한 신성로마제국은 주변국의 침입에 노출되며 위협에 시달렸다.
결국 제후들은 고심끝에 정통성은 있지만 그 세력이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안으로 추대하게 이른 것. 즉위 당시 루돌프 1세가 이미 55세로 당대로서는 엄청난 고령이었다는 것도 추대에 한몫을 했다.
그런데 루돌프 1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반란세력들을 토벌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며 제국의 영역을 넓혔다. 오스트리아 지역을 차지한 루돌프 1세는 아들에게 공작 작위와 영토를 하사했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근거지를 옮겨 600년에 걸친 통치를 이어가면서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가문'으로 불리우는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합스부르크가에 첫 위기가 찾아온다. 루돌프 1세의 뒤를 이은 알브레히트 1세가 조카에게 암살당하면서, 제위는 룩셈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간다. 합스부르크가는 영지가 여러 개로 분열되고 제위 계승에서 배제되며 한동안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또한 합스부르크가는 황제 선출의 투표권을 지닌 제국의 7대 핵심 제후 세력이었던 '선제후'에서도 배제되며 가문의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에 합스부르크가는 대담하게도 과거 황제의 서신에서 '오스트리아 대공작의 지위와 선제후에 버금가는 각종 특권들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위조하여 신성로마제국에 제출했다. 훗날 이러한 위조사실이 밝혀진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19세기 이후였다. 합스부르크가는 이를 바탕으로 선제후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고, 위조 문서에 언급된 것처럼 실제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합스부르크가는 근거지인 빈을 문화예술의 중심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빈의 랜드마크가 된 슈테판 대성당 증축,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빈 대학교의 설립, 예술가와 음악에 대한 후원으로 하이든, 베토벤, 모차르트 같은 거장들이 이 시기에 모두 빈으로 모였다. 이 시기 빈은 파리, 피렌체와 함께 유럽 문화에술의 메카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비록 정치적 의도와 위조라는 어두운 면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셈이었다.
또한 합스부르크가는 대외적으로 세력 확장에도 적극적이었다. 합스부르크가는 기독교 진영의 최전선에서 오스만 튀르크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앞장섰고, 흩어졌던 영지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러한 합스부르크가의 세력 확장에 빼놓을 수 없는 수단이 바로 '결혼 정책'이었다. 알브레히트 2세(1397-1439)는 142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외동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고 1438년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합스부르크가로서는 알브레히트 1세 이후 130년 만에 다시 황제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었다. 이 시기 합스부르크가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의 상속녀 엘리자베트의 영토까지 획득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연이어 황제들을 배출하며 권력을 공고히 다졌다.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프리드리히 3세(1415-1493)는 'A.E.I.O.U'라는 문구를 성벽이나 도시 곳곳에 세웠는데 이는 'Austria Est Imperatrix Ommis UniversI (오스트리아는 전세계의 통치자다)'라는 뜻의 줄임말이었다.
합스부르크가의 결혼정책은 후대에도 이어져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는 프랑스의 명문가인 브르고뉴 공주 마리, 부르타뉴 공국의 안과 연이어 정략 결혼했고, 아내들이 상속받은 땅을 그대로 흡수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가 석연찮은 낙마사고로 요절하자마자 얼마지나지 않아 재혼을 추진했고, 안과의 두 번째 결혼식때는 헝가리와의 전쟁중으로 직접 참석할수 없게 되자 대리인을 보내 혼인을 강행했다.
이러한 결혼 정책이 매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 관계였지만, 합스부르크가 부르타뉴를 공짜로 차지한 데 대한 불만으로 마르게리타와의 혼인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어 1491년에는 전쟁을 일으켜 부르타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안과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는 돌이킬 수 없는 앙숙 관계가 된다.
한차례 쓴 맛을 봤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좌절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강력한 결혼정책을 추진했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스페인 왕실과 헝가리 왕실에 손을 내밀고 자신의 후손들을 연이어 이중결혼시키며 겹사돈을 맺었다. 결혼 이후 운명의 장난처럼 스페인-헝가리 왕실의 상속자들이 줄줄이 사망하거나 통치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서 자연히 그 상속권은 합스부르크가에게 잇달아 넘어갔다.
헝가리 왕 코르비누스는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지만,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너는 결혼을 해라"는 어록을 남기며 합스부르크를 비꼰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도 합스부르크의 결혼정책을 비판하는 표현으로 자주 인용되기에 이른다. 중세 시대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짧았고 가문의 대를 잇는 출산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이는 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와 인연을 맺은 가문들마다 연이어 석연치 않은 비극을 맞이하자 음모론이 양산된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합스부르크가는 결혼정책을 통하여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일대와 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해가 지지않는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펠리페 1세와 스페인 공주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 5세(1500-1558)의 시대에 이르러 합스부르크의 군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스페인 국왕을 비롯한 무려 20여 개의 직함을 가졌을 정도였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합스부르크의 다음 목표는 광대한 영토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결혼정책으로 누구보다 큰 수혜를 누렸던 합스부르크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문의 혈통이 끊기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바로 '근친혼'이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 tvN |
근친혼으로 가문의 운명이 바뀐 것은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였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는 달리, 서유럽 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숙적 프랑스의 존재로 인하여 다른 가문과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웠다. 여기에 철저한 가톨릭 국가라 개신교 진영과 거리를 두다보니 배우자 선택의 폭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4번의 결혼 중 영국 여왕-프랑스 공주와의 정략혼에서 후사를 얻지 못했고, 나머지 두 번이 각각 사촌-조카와의 근친혼이었다. 이때부터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근친혼 시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인물들에 나타나기 시작한 공통된 외형적인 변화는 주걱턱과 부정교합이었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카를 5세-펠리페 2세-펠리페 4세 등은 발음문제로 정확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이 시기부터 주걱턱이 흔히 '합스부르크 턱'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실제로 2019년 과학 학술지 '인간 생물학 연대기'에 게재된 '합스부르크 턱과 근친혼의 상관관계'에 따르면, 세대에 걸쳐 근친혼을 계속할 경우 유전적 특징으로 주걱턱을 가질 확률이 높다는 놀라운 연구결과가 밝혀졌다.
또한 펠리페 2세와 사촌인 첫 아내 마누엘라 사이에서 태어난 돈 카를로스는 날때부터 건강하지 못했고 한 쪽 다리가 짧은 기형을 타고났다. 성격적으로도 7살 아이의 지능에 불과했고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심각한 폭력성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돈 카를로스는 거듭된 기행으로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하고 방안에 유폐되어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돈 카를로스는 '취약X증후군'이라는 유전적인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펠리페 4세는 역시 근친혼으로 태어난 딸 마르게리타 테레사를 외삼촌뻘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레오폴드 1세와 혼약시키기로 약속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미래의 신부인 마르게리타 공주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하여 수시로 전신 초상화를 요구했다고 한다.
마르게리타 공주 역시 어릴때는 정상적인 외모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주걱턱의 유전을 피해가지 못했다.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를 전담했던 왕실 화가 벨라스케스는 주변인들과 사물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릴때마다 공주의 주걱턱이 부각되지 않도록 최대한 감추려고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마르게리타는 레오폴드 1세와 혼인하지만 두 번의 유산과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끝내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짧은 수명은 마르게리타 만이 아닌 근친혼 이후 스페인 왕실의 자녀들 다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비극이었다. 2009년 과학저널 사이트 'PLOS ONE'에서 '근친혼과 수명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 근친혼 이후 스페인 왕실 34명의 자녀중 29.4%가 1살 이전에, 50%에 10살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또한 펠리페 4세의 아들이자 마르게리타의 동생인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가가 그동안 겪었던 유전적 결함을 모조리 아우르는 끝판왕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운동하는 법을 모르고 과학이나 문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며 읽고 쓰는 것도 거의 못한다. 그의 얼굴은 길고 좁고 가늘하며 불균형한 이목구비가 기괴한 생김새를 형성한다" "그는 먹는 것을 모두 통째로 삼킨다. 아래턱이 너무 나와 위아래 치아가 맞부딪힐 수가 없기 때문" 카를로스 2세를 실제로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이 남긴 기록이다.
카를로스 2세는 날때부터 온갖 심각한 기형과 유전병으로 고생했으며 정상적인 생활이나 사고조차 힘들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개인적으로도 불행했다.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어머니 마리아나가 대신 섭정을 맡이야 했고, 두 번이나 결혼했지만 후사를 얻지 못했다. 평생을 온갖 병마에 시달리다가 3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당시로서 이례적으로 국왕인 카를로스 2세의 시신을 부검했는데, 심장은 후추 알갱이 크기만큼 작았고, 내장은 부패되어 있었으며 신장에는 무려 3개의 담석이 있었을만큼 온몸이 만신창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의학 전문가들은 카를로스 2세가 성 장애로 인하여 생식기능에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후계 구도가 불안정해진 스페인은 10여 년에 걸친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했고,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차지하게 된다. 1714년을 끝으로 스페인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대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가문과 영토를 번영시키기 위하여 선택했던 근친혼이 오히려 가문의 약화와 몰락을 재촉하는 재앙이 됐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후로도 200여년을 더 존속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이자 국모로 꼽히는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로트링겐 가문 공작이던 프란츠 1세와 결혼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간 '근친혼의 저주'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된다.
합스부르크가는 나폴레옹에 의하여 신성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로도 오스트리아에서 그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19세기에 접어들며 전쟁의 패배와 민족 갈등으로 점차 국력이 약해졌고 마지막 황제 카를 1세 때에 이르러서는 1차 세계대전의 패망에 따른 전쟁 책임을 지고 재산몰수와 국외 처방 처분을 받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합스부르크가의 후손들은 지금도 유럽 곳곳에서 정치계, 스포츠계, 문화예술계 등에 걸쳐 활발하게 활동하며 가문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을 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을 남겼다. 인간의 욕망은 더 큰 발전을 이루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친 탐욕은 오히려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결혼으로 흥하고 결혼으로 몰락한 합스부르크의 흥망성쇠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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