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 김용준 프로의 골프 모험] 벙커 정리하는 고무래가 없는 골프장, 명문 자부심을 버린 곳

이은경 2023. 7. 19.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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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

독자는 혹시 벙커 주변에 고무래가 없는 골프장을 본 적이 있는가? 고무래가 뭐냐고? 곡식을 그러모으고 펼 때 쓰는 도구 말이다. 긴 ‘T’자처럼 생긴 물건이다.

골프장에서는 벙커 속 모래를 고를 때 고무래를 쓴다. 고무래를 영어로 ‘레이크(rake)’라고 부른다. 레이크라는 단어는 카지노에서 떼는 수수료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카지노 딜러가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놓인 플레이어의 칩을 가져갈 때 고무래를 쓰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카지노 포커 룸에 ‘레이크가 5%이고 최대 금액은 20달러’라고 쓴 안내문이 붙어있다고 치자. 판마다 판돈의 5%를 카지노가 가져간다는 얘기이다. 판이 크든 작든 상관 없이 말이다. 판돈의 5%가 20달러를 넘으면 20달러만 뗀다는 뜻이고. 어떻게 잘 아느냐고? 아차 골프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샜다. 다시 골프장으로 돌아가자. 

벙커 주변에 고무래가 아예 없는 골프장이 있었다. 고무래를 전부 다 치운 것이다. 아주 최근 이야기이다. 코비드-19로 남이 쓰던 물건만 만져도 감염될까 봐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코비드-19 감염을 줄이기 위해 골프장도 온갖 꾀를 냈다. 그 중 하나는 고무래 손잡이를 항균 필름으로 감싸는 것이었다. 항균 필름을 붙인 고무래는 미끄러워서 불편했다. 이슬에 젖기라도 하면 더 그랬다. 손도 많이 갔을 터이다. 필름이 얼마 못 가고 떨어졌을 테니.

조금 지나자 고무래로 벙커 정리를 하지 말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벙커에서 샷을 하고 나서 정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내 문이 골프장에 붙은 것이다. 벙커나 디봇 정리를 잘 하자는 캠페인을 하던 일이 무색해졌다. 고무래를 만지지 않으면 감염 걱정이 없는 것 아니냐는 발상이었다. 고무래에 항균 필름을 붙이는 수고도 덜고.

그래도 진정한 골퍼들은 벙커 정리를 계속 했다. 감염 때문에 찜찜해도 어쩔 수 없었다. 발자국을 남긴 채로 벙커를 떠나는 것이 머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벙커 속에 가득한 발자국은 진정한 골퍼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숙제였다. 내가 만든 발자국만 정리할 것인가? 남이 만든 발자국까지 정리할 것인가? 내가 만든 것이든 남이 남긴 것이든 벙커 속 발자국은 꼭 정리하라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사진=게티이미지

그런데 발자국이 어디 한 두 개여야 다 정리하지. 이런 하소연을 여러 골퍼에게 듣고 뱁새 김 프로도 어떻게 답해야 하나 하고 고심을 하던 차였다. 고무래가 아예 없는 골프장을 만난 것이다. 명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골프장이었다. 처음 빠진 벙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벙커마다 고무래가 없었다. 벙커 속에는 이미 지나간 플레이어의 발자국이 가득했다. 애초에 고무래가 없으니 내가 만든 발자국도 정리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너무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발로 대충 비벼놓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뭐하겠는가? 드나든 발자국은 그대로 남았는데.

그 골프장은 과연 코로나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고무래를 전부 치웠을까? 아니면 내친김에 벙커를 정리하는 수고와 비용까지 줄이려고 그랬을까? 품격을 지키는 골프장은 하루에 한 두 번씩은 꼭 벙커를 정리한다. 장비로 훑은 다음에 벙커 구석을 사람 손으로 꼼꼼히 손질하는 골프장도 있다. 진짜 품격이 느껴지는 골프장이다.

그런데 고무래 만지지 말기 운동은 골프 문화를 후퇴시켰다. 벙커 정리를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벙커를 정리하면 유난을 떠는 것처럼 보일까 멈칫하게 되고.

펜데믹 시기에 골퍼가 크게 늘었다. 시뮬레이션 골프장 영업을 제한하자 필드로 몰려든 것이 계기였다. 벙커 정리를 꼭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적이 없는 골퍼가 무더기로 필드에 들어온 것이다. 골프 연습장에서야 어디 벙커 정리할 일이 있는가? 먼저 배운 골퍼가 잔소리를 하기에도 민망한 시절이었고. 여기에 더해서 벙커 정리를 하지 마라고 골프장까지 안내를 했으니. 

이제 펜데믹은 끝났다. 벙커 샷을 하고 나서는 발자국을 꼭 정리해야 한다. 골프장도 다시 예전처럼 벙커를 잘 정리한 채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고.

벙커에서 그냥 나오면 예전처럼 알려줘야 한다. 발자국 정리를 꼭 하라고. 발자국이 저렇게 많은데 나만 해서 무엇하느냐고 따지면? 당신이 만든 발자국이라도 꼭 정리하라고 알려줘야 한다.

사진=게티이미지

벙커에서 샷을 하고 나면 정리를 하는 것은 플레이어의 의무이다. 다른 사람이 친 공이 내 발자국에 빠지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발자국에서 꺼내 놓고 치겠지 무슨 호들갑이냐고? 고개를 끄덕인다면 절대 뱁새 칼럼 애독자가 아니다. 벙커 속 발자국에 빠져도 벌타 없이 구제를 받을 수는 없다. 규칙대로 골프를 치는 골퍼가 뒤에 따라오고 있을 수도 있다. 정통파 골퍼끼리 팀 룰(로컬 룰)을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벙커 발자국에 공이 빠졌다고 상상해 보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래서 팀 룰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몇 회 전 칼럼에서 이야기했다. 

매끈한 벙커를 다시 보는 날이 빨리 오기 바란다. 고무래를 치웠던 그 골프장도 고무래를 다시 제자리에 비치하리라고 믿는다. 다시 갔을 때 여전히 고무래가 없다면? 명문이라는 자부심을 버린 것으로 알겠다. 

‘뱁새’ 김용준 프로와 골프에 관해서 뭐든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메일을 보내기 바란다. 지메일 ‘ironsmithkim’이다. 

김용준 KPGA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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