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제때 안 쓰면 영구적 인지 장애”…‘대체 불가 약’ 정상화 언제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뇌전증 및 영아 연축 치료제 ‘사브릴정 500㎎’(성분명 비가바트린)에 대해 회수 권고 명령을 내린 것을 두고 의료 전문가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영아 연축은 치료가 늦어질 경우 영구적인 인지 장애를 초래할 수 있어 조기 치료가 중요한데, 처방할 수 있는 약의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영아 연축이란 유아 뇌전증, 경련, 비정상적인 뇌파 패턴, 지적장애를 특징으로 하는 일련의 증상을 말한다. 1~2초 동안 지속되는 짧고 갑작스러운 근수축으로 인해 머리, 몸통, 팔다리가 일시에 굽혀지는 발작 형태를 보이며, 주로 잠들 무렵이나 잠에서 깰 때 일어난다.
사브릴정은 영아 연축 치료에서 다른 항발작 약제보다 뛰어난 효과와 적은 부작용을 갖는 최선의 약제로 꼽힌다. 더불어 공급이 부족한 대표적인 의약품 중 하나다.
지난 14일 식약처가 사브릴정에 대해 영업자 회수 권고 조치를 내린 뒤 일선 의료기관들의 불안은 불어났다. 사브릴정의 공급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처방이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식약처의 조치에 따른 회수 대상은 제조번호 SAFA001(사용기한 2025년 5월5일) 제품이다. 해당 제품은 정신장애 치료제로 국내에 허가된 적 없는 ‘티아프리드’(Tiapride)의 성분이 미량 검출됐다. 티아프리드는 운동장애, 신경근 동통, 공격성, 초조상태 등 신경·정신 장애 치료제로 사용되는 의약품의 주성분이다.
한독은 사브릴정의 원료인 비가바트린을 제조하는 이탈리아 소재 제조원의 같은 생산 라인에서 티아프리드 제조 후 비가바트린이 만들어지면서 티아프리드 성분이 섞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티아프리드 검출량은 1일 노출 허용량인 200㎍/day 미만으로 부작용을 유발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티아프리드 성분이 검출된 비가바트린 제제 회수 절차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식약처는 한독에게 사브릴정 회수를 지시하고 의사, 약사에게는 사용 시 주의를 당부하는 내용의 ‘의약품 안전성 서한’을 배포했다. 또 사브릴정과 관련된 의심 증상이 있는 경우 즉시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에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중증질환 필수의약품 지정 이어 선제적 확보 필요”
식약처는 사브릴정이 영아에 주로 사용되는 점을 고려해 사전 예방 차원에서 회수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약의 부작용보다 약을 못 써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흥동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교수는 18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영아 연축은 치료가 늦어지면 영구적인 인지 장애를 초래하는 질환”이라며 “특히 초기 치료가 중요한데 발병 3주 이후에 치료할 경우 완치율이 현저히 떨어져 평생 장애를 갖게 될 위험이 높다”고 말했다.
황경진 경희대병원 신경과 교수 역시 “영아 연축의 치료에는 일반적인 항뇌전증약이 거의 효과가 없고, 대체할 수 있는 약제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브릴정은 매우 중요한 치료제다”라고 전했다. 황 교수는 “영아 연축의 예후는 나쁜 편이며, 발달지연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며 “사브릴정의 품절은 곧 사브릴정에 반응을 보이는 영아 연축 환자들의 발작이 조절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아동병원들도, 소아청소년과 개원의들도 약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의료현장에선 안 그래도 공급이 부족한 약이 이젠 씨가 마를 것이라는 한탄 섞인 말이 나온다.
최용재 대한아동병원협회 부회장은 “약 없이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약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당 부처를 찾아가고 기자 회견도 했다. 요즘 약 없이 견뎌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청천벽력’은 지금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소아들에게 쓰는 약은 생산·보호·수가 체계를 분류해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 의료취약계층 아이들이 약이 없어 고통 받는 일을 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약의 혈중농도가 유지돼야 한다”며 “대체약이 없고 공급도 딸리는 상황이라면 약을 처방했을 때의 이익과 처방받지 못했을 때의 이익을 비교한 다음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김흥동 교수도 “코로나19 예방 접종이 한창일 때 방역당국은 약물의 부작용으로 인한 위험보다 예방 효과로 얻을 이익이 크기 때문에 전 국민이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며 “이 논리를 현 상황에 적용한다면 미량의 약물 성분이 함유된 약을 복용했을 때의 위험도와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의 건강적인 측면을 비교하고 살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의약품 부족이 장기화될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환자에게 갈 것이라며 유관 학회나 전문가와 함께 의약품 관리·회수 매뉴얼을 만들고, 중증질환 필수의약품을 지정해 선제적 확보가 이뤄져야한다고 제언한다.
황경진 교수는 “영유아 중증질환 치료에 필요한 약이 품절되면 의료진의 적절한 판단이 어렵게 되고, 이는 환아의 장기적인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라며 “정부는 유관 학회와 논의해 중증질환 필수의약품을 지정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종합적 판단에 따른 회수 권고…98만정 이달 안에 확보”
정부는 사브릴정 부족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면서 한독이 12월에 수입하기로 했던 원료(벌크정제) 98만정을 이달 안에 수입하기로 했으며, 오는 21일 통관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98만정은 약 5개월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의료현장에서 사브릴정의 수요와 공급 현황 등을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아동병원협회와의 간담회, 전문가 자문, 업계 협의를 거쳤고 한독에 신속히 공급하도록 독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 업체가 보유한 회수대상이 아닌 유통 가능량 9만2000정과 7월 내 추가 공급될 물량 98만정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이번 회수 권고 조치를 취했다”며 “오는 12월 수입 예정이었던 원료 98만정을 7월에 수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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