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미안, 내가 대신 사과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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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 부모 사이의 채무 관계로 법원 조정실까지 오게 된 한 학생을 만났다.
"어른들이 잘해야 하는데 같은 어른으로서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당장 엄마 아빠가 싸움을 끝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오늘 학생이 법원에 나와서 솔직한 마음을 말해줘서 긴 싸움이 훨씬 짧아지게 될 거야.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시간은 의미가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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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 부모 사이의 채무 관계로 법원 조정실까지 오게 된 한 학생을 만났다. 담당 판사는 학생을 법원에 불러놓고 걱정이 됐는지 특별히 아이 마음이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법원이 낯설고 어려울 학생을 위해 오렌지 주스와 쿠키를 준비해 두고, 딱딱한 조정실 대신 사무실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리 무뚝뚝한 사춘기라도 입을 열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MBTI가 뭐야?”라는 질문부터.
학생에게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묻자 엄마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렸고,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냐는 질문에는 “바로 지금”이라고 했다. 바라는 게 뭐냐는 질문에는 “제발 엄마 아빠가 이 모든 싸움을 다 그만뒀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이의 진심을 전하자, 전남편과의 합의를 계속 거절하던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전히 합의를 하겠다는 말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엄마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도 하실 수 있어요. 용기를 내 보세요. 엄마시잖아요.”
엄마에 대한 반감으로 만남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학생에게도 말했다. “어른들이 잘해야 하는데… 같은 어른으로서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당장 엄마 아빠가 싸움을 끝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오늘 학생이 법원에 나와서 솔직한 마음을 말해줘서 긴 싸움이 훨씬 짧아지게 될 거야.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시간은 의미가 있을 거야.”
이 부부 사이에 누구라도 먼저 상대방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더라면, 그리고 엄마가 자녀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고 말했더라면, 누구보다 가까웠을 가족들이 법원에서 만나는 상황까지 오게 됐을까? 나는 법원에서 수많은 조정 사건들을 진행하면서 상대방이 사과만 했더라면 소송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고 보면 최근 들어 우리는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점점 더 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지고 들어가는 것 같고,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그렇다. 하지만 상대방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과 위로의 마음을 전하더라도 내가 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이고, 얼마나 힘이 드실까요. 제가 안타깝고 죄송하네요”라고 내가 대신 사과의 한마디를 전한다. 그러면 “아니, 조정위원님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요”라고 하면서도 조금은 위로를 받는 것이 느껴진다.
변호사도 치열하게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 같다. 본처가 상간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의 조정이 있었다. 본처는 어디 제대로 한번 싸워보자고 변호사를 대동하고 당당하게 법원에 나왔지만, 상간녀는 변호사만 내보내고 본인은 나오지 않았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며 노발대발하는 본처 앞에서 조정이 이뤄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상대방 변호사의 비기가 필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제가 변호사로서 대신 정중하게 사과드리겠습니다. 마음 푸시고 이 정도 선에서 끝내시지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마침 센스 있는 변호사의 사과 덕분에 이 사건은 원만하게 잘 종결됐다.
우리나라는 권위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변화됐고, 인터넷에는 법률지식이 홍수처럼 넘쳐난다. 전문가의 권위에 기대기보다 우리 스스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외적 역량이 갖춰진 것이다. 그런데 분쟁을 해결하는 능력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내적 용기도 포함된다. 오늘 내가 대신 전한 사과 한마디가 날이 바짝 서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기를, 그래서 무거운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내려놓고 화해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안지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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