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장혁의 시선] 온정주의와 등질 때 필요한 것
온정주의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갓난아이를 살해하는 엄마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18일 국회는 영아살해죄와 영아유기(치사)죄를 형법전에서 70년만에 삭제했다. 이제 영아살해는 살인죄(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이상의 엄벌로 다스리게 됐다.
이번 개정이 들어내는 건 단순히 형법 조문 두 개가 아니다. 양육 곤란에 처한 산모에 대한 온정주의라는 뿌리 깊은 법감정이다. 1953년 형법전에 영아살해죄(251조)가 도입된 이래 50년 넘게 출산 직후 아이의 입을 틀어막거나 목을 조른 산모들에게 내려진 처벌의 주류는 징역 1~3년 형의 집행유예였다. 1973년 남아 선호 압박 속에 출산한 8번째 딸을 연못에 던진 김모씨는 징역1년 집행유예 3년, 1989년 성폭행 당해 낳은 아이를 목 졸라 죽인 용모씨는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1년. 재판부는 각각 “초등학교도 졸업 못해 무지하고 아들을 간절히 바라는 남편에게 면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라거나 “강간 당해 임신하게 된 수치심 때문에” 등을 양형사유로 들었다. 생명 침해에 대한 비난보다는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측은함이 크게 작용했다. 영아살해죄의 존재가 온정주의를 강제한 면도 있지만, 신생아를 태아와 사람의 중간적 생명체 정도로 보는 인식이 법적 판단 아래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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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아살해죄 폐지, 살인 수준 처벌
병원밖 출산 같은 부작용 우려
보호출산제로 출구 마련 필요
」
‘직계존속이 치욕을 은폐하기 위하거나 양육할 수 없음을 예상하거나 특히 참작할 만한 동기로 인하여 분만 중 또는 분만 직후의 영아를 살해한 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영아살해죄는 일본이 1940년 검토에 그친 안을 가져오면서 더 가벼운 처벌이 가능하도록 법정형의 하한을 없앤 것이다. 전쟁통에 극한 곤궁함 속에서 강간 등으로 인해 원치 않은 아이를 갖게 된 여성들이 많았던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고 한다.
검찰과 법원의 눈치는 국회보단 빨랐다. 2006년 7월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에 살던 베로니크 쿠르조 씨가 자녀 둘을 살해해 냉동고에 보관한 사건이 드러나면서 경각심이 고조됐고, 2010년 이후 아동학대가 이슈화하면서 영아살해죄로 기소된 산모도 실형을 받는 일이 늘었다. 판결문에는 “사람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보호돼야 할 가치이고, 갓 태어난 아기의 생명 또한 예외일 수 없는 점, 이 사건은 당시 피해자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보호자였다고 할 수 있는…” 등의 문구가 등장했다. ‘분만 직후’를 엄격히 해석해 분만 후 하루라도 지난 뒤에 일을 벌인 엄마들에겐 살인죄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2014년 도입된 아동학대치사죄(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가 영아유기치사죄를, 2021년 추가한 아동학대살해죄(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가 영아살해죄를 일부 대체하면서 중형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신생아의 생명권을 산모의 심리 상태나 양육 환경보다 중시하는 입법적 선언은 이제야 나왔다. 총선을 앞둔 의원들로선 전국에서 200명이 넘는 아기들이 울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을 외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영아살해를 ‘실패한 낙태’로 인식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이번 개정을 낙태 금지론자들의 ‘반동’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미 신생아가 부모의 소유물도 산모의 신체 일부도 아니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렇더라도 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선 꼭 짚어야 할 물음이 있다. 무책임한 산모를 엄벌하면 한명의 아이라도 더 살릴 수 있게 될까. 출생통보제가 시행되고 영아살해죄가 폐지되면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의 존재가 누락없이 등록되고, 갓난아이의 목숨을 거두는 엄마들은 보다 쉽게 적발돼 중형을 받게 된다. 베이비박스나 보육원 앞에 몰래 아이를 두고 떠나는 엄마들에 대한 처벌도 강화된다. 하지만 엄벌은 원치 않은 임신과 숨기고 싶은 출산, 양육 곤란의 처지를 막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 앞으로 같은 기로에 놓이는 산모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흔들리는 책임감을 부여잡는 이들도 있겠지만, 목숨을 건 병원 밖 출산과 임신 후반기 낙태 시도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산모들의 극단적 선택도 걱정이다.
출구가 필요하다. 도저히 아이를 기를 수 없다는 산모가 중범죄의 길에 들어서는 걸 막고 아이를 안전한 보육시설에 안길 수 있는 길이 제시돼야 한다. 유력한 대안으로 논의되던 보호출산제는 국회 논의과정에서 부모가 누군지 알 아이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반박에 제동이 걸린 상태다. 준비 안 된 엄마들에게 병원에서 분만해 아이의 출생 등록이 이뤄지더라도 익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 생명을 위해서라면, 다른 길이 있을까.
임장혁 사회부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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