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사바세계는 자비로 건넌다
습도가 너무 높아서인지 밤새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쳤다. 새벽녘이 되자 더 사납게 비가 내리는데, 누워서 들으니 마치 폭포 아래 있는 것만 같았다. 문득 일본의 게곤(華嚴)폭포 아래 서 있었던 생각이 났다. 이름만큼이나 웅장했던 화엄폭포는 한여름에도 꽤나 싸늘해서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때의 그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에 온 국토가 물바다가 되고, 여기저기서 괴로움의 비명이 들리는데, 그마저도 폭우에 파묻히는 듯하다. 온 국민의 마음이 힘들고 버거우니, 내게도 괴로움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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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 천장에 비가 새며 큰 낭패
자연이 아프니 인간도 아프다
서로에 도움 되는 존재가 돼야
」
어릴 적 금강 가까이 산 나는 이런 풍경을 몇 번이나 접했다. 불그스름한 금강물이 집안까지 무섭게 밀려드는 모습 말이다. 강이 범람하면 주변의 논밭이라곤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이어 집이 잠기고 마을이 잠겼다. 키우던 소가 떠내려간 집도 여럿 되었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인근 학교로 피했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돌아와 부엌에서 물을 퍼내곤 했다. 그때를 떠올리니 가물가물하던 어머니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고사리손에 바가지를 쥐여주며 물 퍼내라던 상기된 음성도 아련하게 들리는 듯하다.
망상 끝에 이러다 법당 지붕이라도 내려앉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정신 차려야지.’ 얼마 전 비가 샌 지붕 이음새가 불안했다. 하수구에 물이 잘 빠지도록 해놓고, 심란한 마음에 도량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괜찮구나 싶어 안심하고 들어왔더니, 문제는 안에서 터졌다. 무섭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기어이 천장을 뚫고 내려와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진즉에 천막이라도 덮었어야 했는데, 후회막급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염치 불고하고 전화를 돌려 도움을 청했으나, 종일 비가 내린 탓에 몇 번의 통화만 이어질 뿐, 지붕이 미끄러워 올라갈 수도 없었다. 아픈 발목만 아니었다면 지붕 오르는 것쯤 일도 아닌데, 곱씹어 생각하니 속이 편치 않았다. 며칠째 천장에 푸른곰팡이가 번져가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은 곤욕이었다. 사바세계는 역시 고해(苦海)로구나. 그저 타는 속을 눌러 참는 수밖에. 법당문을 나서며 무심코 나도 모르게 불단(佛壇)을 째려보았다.
지금껏 살면서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심어본 적 없는 내가 머리 깎고 출가해서는 남들에게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추상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땅이 온통 물바다인데도 내 머리 위 지붕 하나도 처리 못 하고 애태우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내 발등 불 끄기에 급급한 나머지, 남의 일은 마냥 남의 일로만 미뤄둔다.
자비실천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을 불교에서는 보살(Bodhisattva, 菩薩)이라고 부른다. 보통은 절에 다니는 여성 신도에게 ‘보살님’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보살이라는 단어는 보디(Bodhi, 깨달음)와 사트바(sattva, 중생)의 합성어이다. 깨달음을 구하며 중생을 교화하는 존재를 말한다. 이들은 깨달음을 구하며 수많은 생명까지 아울러 자비를 실천한다.
이러한 보살의 삶에서는 깨달음 따로, 중생 따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과 중생교화의 길은 한 방향이니, 수행이 곧 보살행이 된다. 다시 말해, 중생교화 자체가 깨달음을 구하는 행위인 셈이다. 이를 분별하면 할수록 깨달음은 요원해진다. 80권이나 되는 『화엄경』도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지만, 정작 그 핵심을 ‘자비’라는 두 글자로 압축할 수 있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다.
재가자인데도 불교의 참뜻을 깨쳤다고 하는 유마(維摩) 거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마 거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간 문수보살이 거사에게 병세와 그 원인을 물었다. 이에 유마 거사가 답하기를, “아득히 먼 과거부터 생사를 거치면서 중생이 병들었으니 나도 따라 병든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의 병이 나으면 나도 낫게 될 것입니다. 만약 중생이 병과 고통에서 벗어난다면, 모든 보살의 병도 사라지게 됩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프고 자식이 나으면 부모도 나아지듯, 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하였다.
이렇듯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자연이 아프면 인간도 아프다. 언제든 아픈 상황에 처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흔들림 없는 마음을 견지해야 비로소 진정한 보살이 된다. 물론 자비심만 있다고 해서 지금 당장 사회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해줄 힘은 충분하다.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심은 ‘자비’가 각각의 ‘전문 영역’과 만났을 때,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살만해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더욱이 지금처럼 힘든 때에는 비난과 원망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자비로운 마음이 절실히 필요하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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