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비는 선생이다
두 해 전 이맘때 내린 비로 집 지하창고가 물에 잠긴 적이 있다. 멀리 있다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나는 하나의 열쇠 구멍에 하나의 열쇠 꽂는 그 쉬운 일에도 허둥거리는 참이었다. “이리 줘보세요, 제가 딸게요.” 문이 열리자 내 종아리께를 단숨에 치고 나갈 정도의 수위로 내 종아리가 휘청할 정도의 힘으로 쏟아져나오던 빗물의 함성은 나와 경비 아저씨의 탄식을 나오는 족족 삼킬 정도였다.
“아이쿠야. 눈비만큼 세상천지 무서운 물이 또 없다니까요.” 경비 아저씨가 양수기를 가지러 간 사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물에 흠뻑 젖은 창고 안 물건들을 눈으로 재확인하는 일뿐이었다. 더는 안 쓸 온갖 세간살이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밥벌이와 연관이니 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책 박스가 물에 불어 여기저기 터져 주저앉기 시작하는데 이상하지,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데서 나는 이거 공부다, 하는 확신이 들었으니 말이다.
창고 공사를 하는 사이 내게 주어진 몫은 그럼에도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책과 그러니까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책을 가려내어 그 후자를 포대 자루에 담는 일이었다. 어디 사랑만이 그러할까. 젖어든다는 건 소리 없이 차차 퍼져서 차차 넓어지는 일이라 몽땅 버려지게 된 수천 권의 책 앞에서 나는 내게 이런 책이 있었나 싶게 낯선 책들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내게 이런 책이 있었지 싶게 낯익은 책들 앞에서는 죄책감을 동시에 느껴가며 책표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비라는 물의 무서움은 그 투명함으로 이런 미련을 갖게 만드는 힘에도 있으리라!)
두 해 후 지금껏 그때 버린 책의 간절함으로 안달이 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한 번씩 책이 있다 사라진 창고에 서게 되면 책의 쓸모에 대해 근원적인 자문을 하게 된다. 말없이 가르치는 선생이 누구냐 할 적에 늘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 나일진대 이번 여름은 특히 두 손 자주 하늘로 모으게 된다. 비는 그렇게 절로 선생이 된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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