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협의그룹 출범한 날 '미국인 월북'…협상 트리거 될까
유엔사 "북측에서 신병확보 확인…해결 협조"
'송환' 계기로 북미 접촉 테이블 마련 가능성
"대화 열린다 해도 비핵화 협상 발전 회의적"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는 확장억제 수위를 최고조로 높이는 한미 핵협의그룹(NCG)이 출범한 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미국인이 월북하는 초유의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일각에선 문제의 인물에 대한 '인도적 송환'을 구실로 삼아 북미가 접촉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18일 유엔군사령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경기 파주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안보 견학을 진행하던 중 미국인 1명이 무단으로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인물이 '주한미군 소속 이병'이라는 소식도 나오고 있지만, 유엔사 측은 미국인이라는 점 외엔 구체적인 신원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날 사건은 외국인 관광객 등이 뒤섞인 상태에서 군사분계선을 두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건물 등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장에는 한미 병력이 배치돼 있었으나, 총기를 사용한 무력 제지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8년 9·19 군사합의를 통해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 등에 합의하면서 화기를 철수했던 만큼 병력은 비무장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 소식통은 "사건 당시 필요한 조치는 모두 완비됐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유엔사 관계자는 "북한이 해당 인원의 신병을 확보한 것으로 파악했다"며 "사건 해결을 위해 북한군과 협조하고 있다"고 했다.
월북한 인물이 주한미군이 맞다면, 미군이 북한으로 넘어간 사례는 수십 년 만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표적 사례로는 1962년 주한미군 기갑사단 소속으로 근무하던 중 월북했던 제임스 드레스녹 등이 있다. 6·25전쟁 이후 월북한 미군은 모두 4명으로 알려졌다. 반대로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한 사례는 2017년 '오청성 사건' 등이 있다.
대북 압박 최고조로 높인 날, 돌연 미국인 월북?
공교롭게도 이번 사건은 한미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협의그룹(NCG) 첫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한 날 벌어졌다. 특히 1981년 이후 42년 만에 미국 오하이오급 핵추진 탄도유도탄 잠수함(SSBN) '켄터키함'이 한반도에 기항한 날이기도 하다. 이 같은 대북 압박 움직임은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워싱턴 선언'에 따른 것으로,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 강화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준 차원이다.
그러나 미국은 되레 난처한 상황이 됐다. 북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높인 상황에서 돌연 미국인이 월북하는 상황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특히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전날 담화를 통해 "미국이 확장억제 체제를 더욱 강화할수록 우리를 회담탁(회담 테이블)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 탓'이라는 취지의 내용으로, 미국의 '대화 제안'에 대한 답이었다.
"북미 접촉 가능성" vs. "비핵화 협상 발전 회의적"
일각에선 월북한 미국인의 '인도적 송환'을 놓고 미국과 북한이 접촉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과거 북한은 억류 중이던 미국 국적의 언론인, 선교사 등의 송환을 통해 대미 협상을 시도한 전례가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총장은 "미국이 물밑에서 협상을 진행하면서 거물급을 방북시키면 북한이 관심을 보이는 행태로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이 경우 월북한 인물의 (북한으로의) '귀순 의사'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진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것이라면, 미국도 그에 대한 송환을 요구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월북하는 초유의 돌발행동을 감행한 것이라 해도, 한미의 압박 공조에 시달리던 북한이 순순히 미국인을 돌려보낼 가능성은 작다는 것이 정부 안팎의 평가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월북 사유'를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진단했다. 예비역 육군준장으로 과거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북측을 여러 차례 직접 상대했던 문 센터장은 "예단하기 조심스럽지만, 월북한 미국인이 돌아오길 희망하고 그를 위해 미국이 접촉을 시도한다 해도, 비핵화 협상 테이블까지 발전할 가능성은 회의적"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는 유엔사 통제를 받기 때문에 상황 발생 시에도 한국군이 아닌 유엔사 측에 보고하게 돼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도 합동참모본부를 비롯한 우리 군 당국이 아닌 유엔사를 중심으로 대응이 이뤄지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의 돌발행동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군 당국이 경계 및 화력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양낙규 군사전문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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