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바이오보다 핫하다…진격의 K-메디테크 [스페셜리포트]
최근 국내 증시와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메디테크(Meditech)’ 화두가 급부상 중이다. 메디테크는 ‘의료 기술’을 뜻하는 ‘메디컬 테크놀로지(Medical Technology)’의 줄임말이다. 환자 진단·치료 때 의료 전문가를 보조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여러 장비와 기술, 솔루션 등이 모두 메디테크에 속한다. 인공지능(AI)·로봇 기술 발전과 더불어 건강과 웰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최근 투자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현재 글로벌 메디테크 트렌드를 주도하는 건 ‘K-메디테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에서 국내 기업을 인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데다 특히 AI 진단 분야는 ’한국이 글로벌 주가 상승을 주도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그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잇따르는 글로벌 M&A
‘인공 췌장’ 이오플로우, 1조원에 인수
해외 M&A 증가는 달라진 국내 메디테크 기업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각 분야 글로벌 1위 기업이 국내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기술 경쟁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업계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건 코스닥 상장사 ‘이오플로우’ M&A다. 미국 의료 기기 기업 메드트로닉(Medtronic)이 7억3800만달러, 한화로 9700억원이 넘는 금액을 내고 이오플로우를 인수했다. 지난 5월 메드트로닉은 주당 3만원에 이오플로우 상장 지분을 전량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체결일 기준 이오플로우 종가가 2만505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메드트로닉이 책정한 ‘웃돈’이 약 20%나 된다.
이오플로우는 웨어러블 인슐린 펌프 ‘이오패치’를 주력으로 하는 기업이다. ‘이오패치’는 당뇨 환자 혈당 관리를 위해 인슐린을 지속 전달하는 체외 인슐린 주입기다. 기존에는 주사기나 펜을 이용해 환자가 그때그때 인슐린을 직접 주입해야 했다. 이오패치는 이런 번거로움을 덜었다. 복부나 팔다리 등 피하 지방이 많은 부위에 패치를 부착하기만 하면 끝이다. 일회용 패치를 넘어, 내장된 센서가 혈당을 자동 측정해 인슐린 주입량과 시기를 자동 조절하는 방향으로 고도화되고 있다. 이오플로우 솔루션이 ‘인공 췌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인슐린 패치와 인공 췌장 분야에서 이오플로우는 자타공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 현재 일회용 웨어러블 인슐린 펌프를 상용화한 기업은 미국 글로벌 1위 기업 ‘인슐렛(Insulet)’ 하나뿐이다.
매출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2021년 6억9000만원에서 지난해 67억원까지 10배 가까이 뛰었다. 수출이 전체 매출 60% 이상을 차지할 만큼 해외 비중이 높다는 점도 특징이다. 김재진 이오플로우 대표는 “이오플로우가 갖고 있는 초저전력형 구동부 기술 덕분에, 패치 크기와 무게는 전과 비슷하게 유지하면서 약물 저장량은 훨씬 늘어났다. 저장량 증대로 사용 가능 기간이 길어져 환자 편의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 생산 원가 리스크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국내 메디테크의 해외 M&A 사례는 더 있다. 소화기 금속 스텐트 전문 기업 ‘태웅메디칼’은 올해 2월 일본 올림푸스가 약 4880억원을 주고 지분 100%를 인수했다. 소화기 스텐트는 혈관·장기 통로가 좁아지거나 막혔을 때, 그 흐름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집어넣는 ‘금속 그물망’이다. 수술 없이 내시경으로 치료하는 ‘최소침습형’ 시술 핵심으로 평가받는다.
태웅메디칼은 스텐트 중에서도 담도·식도·대장·십이지장 등 소화기 내과용 스텐트에 특화된 기업으로 유명하다. 미국·일본·유럽을 포함해 약 70여개 국가에 연 3000만달러(약 395억원)를 수출할 정도로 글로벌 경쟁력을 인정받은 강소기업이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일본 올림푸스도 이런 경쟁력을 인정해 인수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올림푸스는 대중에게 ‘디지털카메라’ 기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 세계 소화기 내시경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가브리엘라 케이너 올림푸스 치료솔루션사업부 총괄은 “태웅메디칼은 올림푸스 소화기 포트폴리오를 강화할 수 있는 우수한 스텐트 제품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앤코, 루트로닉에 1조원 베팅
해외에서만 K-메디테크 기업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내 사모펀드도 메디테크 시장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실제 M&A도 잇따른다. 지난해 베인캐피탈이 피부 미용 의료 기기 기업 ‘클래시스’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올해 상반기에는 유전체 분자 진단 전문 기업 ‘랩지노믹스’, 치과용 3D 스캐너 기업 ‘메디트’가 각각 루하PE와 MBK파트너스에 인수됐다. 올해 6월에는 한앤컴퍼니가 총 9500억원이 넘는 금액에 미용 의료 기기 기업 ‘루트로닉’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인수 사례를 살펴보면 ‘미용 의료 기기’에 대한 관심이 유독 두드러진다는 걸 알 수 있다. 해외에서 뷰티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데다 엔데믹으로 마스크 의무화가 사라지는 등 호재가 많고 미래 성장 가능성도 높다는 판단에서다.
한앤컴퍼니가 인수를 추진 중인 ‘루트로닉’은 해외 기업이 대부분이던 국내 피부 미용 의료 기기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000년대 초 국내 최초 의료용 레이저 기기를 개발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후 현재는 미국·독일·일본·중국 등 전 세계 80여개국에 의료 기기를 수출하고 있다. 클라리티II, 라셈드 울트라, 헐리우드스펙트라 등 기기가 유명하다.
실적이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린다. 지난해 매출은 2642억원으로 전년(1736억원) 대비 52.1% 증가했고 영업이익(558억원)과 순이익(456억원) 역시 전년보다 각각 87.3%, 64.7% 늘어났다. 설립 이래 최대 실적이다. 해외에서도 잘나간다. 지난해 수출만 2329억원으로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8.2%에 달한다. 특히 미국 매출이 104.6% 성장하면서 전체 실적을 견인했다.
지난해 4월 역시 베인캐피탈이 6699억원을 주고 지분 약 61%를 사들이며 최대주주로 올라선 ‘클래시스’도 있다. 핵심 제품은 고강도 집속 초음파 에너지(HIFU) 장비인 ‘슈링크’다. 초음파 에너지로 피부를 수축시켜 탄력을 복원하는 방식이다. 2014년 처음 선보인 이후 빠르게 국내 시장점유율을 높여 현재는 전국 3000여개 병·의원에서 사용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피부과, 성형외과 등 미용 전문 의원이 개원할 때 필수 의료 기기로 꼽힌다. 2020년 765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1418억원으로 늘었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406억원에서 906억원까지 두 배 이상 뛰었다. 50%를 훌쩍 넘는 높은 영업이익률도 눈에 띈다.
루트로닉과 클래시스 외에도 눈여겨볼 만한 국내 미용 의료 기기 기업이 많다. 고주파(RF) 의료 기기 ‘포텐자’와 초음파(HIFU) 의료 기기 ‘리니어펌’ 등을 만드는 제이시스메디칼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연매출 1165억원을 기록하며 루트로닉과 클래시스에 이어 국내 피부 미용 의료 기기 제조 기업으로는 역대 세 번째로 1000억원 매출을 넘어섰다. 이 밖에도 색소 질환 치료에 특화된 ‘이루다’, 레이저·에너지 기반(RF·HIFU) 원천기술을 보유한 ‘원텍’, 마이크로니들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비올’ 등이 미용 의료 기기 핵심 기업으로 꼽힌다.
의료기관이 아닌 집에서 ‘셀프 미용’을 즐길 수 있는 ‘홈케어 디바이스’ 시장도 빠르게 덩치를 키워가고 있다. ‘널디’ 등 패션 브랜드로 널리 알려진 기업 ‘에이피알’이 대표 주자다. 지난해 매출(3977억원)이 전년 대비 175% 가까이 성장했는데, 중심에 뷰티 디바이스 전문 브랜드 ‘에이지알(AGE-R)’이 자리한다. ‘김희선 미용 기기’로 널리 알려진 뷰티케어 디바이스 에이지알은 지난해 국내외에서 약 60만대가 팔리며 1100억원 매출을 올렸다. 올해 6월 CJ온스타일로부터 상장 전 지분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기업가치 1조원을 인정받으며 ‘유니콘 기업’에 등극하기도 했다.
루닛, 연초 대비 주가 7배 폭등
메디테크 하드웨어 분야에서 미용 기기에 대한 관심이 높다면 소프트웨어에서는 단연 ‘AI 진단’ 분야 기업이 ‘핫’하다. AI를 활용해 질환 여부를 파악하고 발생 위험을 예측하는 기술이 핵심이다. 최근 급부상한 ‘생성형 AI 기술’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관심이 더욱 커지는 중이다. 쌍두마차는 ‘뷰노’와 ‘루닛’이다. 두 기업 모두 올 초 대비 주가가 6배 이상 오르는 급등세를 보이며, 한국을 넘어 글로벌 AI 진단 섹터 주도주로 평가받는다.
‘뷰노’는 의료 데이터를 분석해 질환 발생 위험을 예측하는 AI 의료 기기 전문 개발 기업이다. 혈압·맥박·호흡·체온 등 데이터를 수집해 심정지를 예측하는 ‘딥카스’가 주력 제품이다. 최근에는 하드웨어를 넘어 솔루션 사업으로 영역을 빠르게 확장해나가고 있다. AI 기반 흉부 엑스레이 영상 판독 보조 솔루션 ‘뷰노메드 체스트 엑스레이’가 주력이다. AI가 엑스레이 영상을 분석해 결절·경화·간질성 음영 등 이상을 탐지해 의료진에게 이상 소견을 제시하고 위치까지 알려준다. 2021년 삼성전자가 개발하는 이동형 디지털 엑스레이 촬영 장비에 뷰노메드 체스트 엑스레이를 탑재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
최근에는 글로벌 진출 보폭을 더욱 넓혀가는 모습이다. 사우디아라비아 ‘SEHA 가상병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사우디 정부는 의료 인프라 구축을 위해 총 660억달러(약 86조원)를 투자하는 국가 전략 사업 ‘비전 2030’을 가동 중이다. 루닛은 사우디 보건부 산하 공공 의료 가상 병원에 AI 영상 분석 솔루션을 설치했다. 성능 평가가 성공하면 사우디 전역 170개 국공립 가상 병원 ‘국가 암 검진·결핵 검사’ 프로그램에 루닛 제품이 활용될 예정이다.
뷰노와 루닛 외에도 AI 진단 기업이 많다. AI 엑스레이 진단 솔루션 직접 개발뿐 아니라 의료인의 솔루션 개발을 돕는 사업 모델도 갖고 있는 ‘딥노이드’, 뇌졸중 CT와 MRI 진단에 강점을 갖고 있는 ‘제이엘케이’, 뇌신경 퇴화 영상 분석으로 알츠하이머 진단과 치료 분야에서 기대감을 키워가고 있는 ‘뉴로핏’ 등이다.
AI 기술은 질환 진단과 예측 외에도 다방면으로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토모큐브’는 AI 기술을 활용해, 살아 있는 세포를 3차원으로 보면서 분석하는 현미경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기존 현미경은 죽은 세포를 평면으로밖에 관찰할 수 없어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AI 기반 디지털 치과 솔루션 전문 기업 ‘이마고웍스’는 AI를 활용해 자동으로 치아나 보철물을 디자인하는 캐드캠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 치과의사 등 치과 종사자들에게 AI 솔루션을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 방식으로 제공한다. 김충현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AI 진단 같은 의료 AI 애플리케이션 영역은 국내 기업 외에는 글로벌 상장 기업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갖는다. 대부분 글로벌 스타트업이 기술 개발을 주도했지만 팬데믹 기간을 거치며 금리 인상, 밸류에이션 인플레이션 등으로 IPO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상장에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병원 정상화·K뷰티 확산 등 호재
국내 메디테크에 대한 투자자와 글로벌 기업 관심이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말한다. 팬데믹 이후 병원 운영이 정상화됐고 디지털 기반 맞춤형 의료 수요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기술 경쟁력이 뛰어난 국내 기업이 수혜를 입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국내 제조와 IT, 무선 통신 등 그간 축적해온 기술력이 의료 분야에서도 성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미용 의료 기기 분야는 경쟁력이 확실하다는 의견이 많다. 앞으로 개척할 수 있는 해외 시장이 워낙 크다는 점에서다. K콘텐츠와 K뷰티가 글로벌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의료 강국’, 특히 ‘미용 성형 강국’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박종현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에서 성능 평가를 마친 기업들은 해외 진출을 시작한다. 국내 기업은 가격 경쟁력이 워낙 좋다. 고가 오리지널 장비 구매를 꺼리던 신흥국에선 유사한 성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저렴한 한국 제품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정동희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미용 의료 기기 산업 자체가 기업 투자 측면에서 볼 때 보유한 장점이 워낙 많다. 중소 바이오텍 대비 상대적으로 투자 회수 기간이 짧다는 점, 현금흐름 창출 능력 대비 시설 투자 규모가 훨씬 작다는 점,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 시장의 경우 의약품처럼 허가에 기반한 기술적 해자를 누릴 수 있다는 점 등”이라고 말했다.
메디테크 전망이 밝은 것과는 별개로, 유망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는 아쉽다는 반응도 나온다. 우리 기업이 갖고 있는 기술 경쟁력과 성장 가능성 대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팔려 나가고 있다는 진단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는 “메디테크는 한국 핵심 신성장동력 중 하나다. 투자가 이어지고 기술 역량을 조금 더 제고하면 장기적으로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받을 수 있는 기업이 많다”며 “유망 기업이 이탈하지 않도록 민간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비전을 갖고 투자와 지원을 확대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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