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 60년, “매 순간이 한없는 은혜였소”
오는 22일 영락교회서 ‘교회음악 60년 기념음악회’ 열어
“한국 합창의 거장이요? 교회음악의 슈바이처라고요? 당치 않습니다. 저한테는 성가대 지휘자 김명엽이 가장 편한 옷입니다.”
어린이 찬송가 악보를 펴둔 채 피아노 앞에 앉은 지휘자는 자세를 낮춘 채 자신에게 붙은 웅장한 수식어를 떼어내기 바빴다. 생의 8할 가까이 음표를 그리며 국립합창단 예술감독, 서울시합창단장, 울산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 등 선 굵은 발자취를 남겼지만, 팔순의 목전에 선 음악가는 눈가 깊이 패인 주름에 연신 교회음악에 대한 애정을 담아내기 여념이 없었다.
18일 서울 서대문구 교회음악아카데미에서 만난 김명엽(남대문교회 은퇴장로) 전 연세대 교회음악과 교수는 우리나라 교회 음악의 살아있는 역사 같은 인물이다. 그는 지난 1963년 자신의 모교회인 서울 용산구 성광교회(당시 김동수 목사) 어린이 성가대 지휘를 맡은 이래 교회음악으로의 외길 60년을 걸어왔다.
김 교수에게 음악은 곧 신앙이고 희망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여섯 살 되던 해에 전쟁 고아가 됐다. 외로움과 막막함으로 점철되던 그의 삶을 일으킨 건 부산에서의 피란 생활 가운데 자신을 지탱해 준 고모였다.
“고모 손을 잡고 초량교회에 다녔어요. 고모는 밤새 재봉틀에 앉아 만드신 옷을 머리에 이고 국제시장에 내다 팔았지요. 그 재봉틀 앞에서 쉬지 않고 불러주신 찬양이 제 인생을 교회 음악으로 이끌었습니다. 돌아보면 매 순간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 아닌 것이 없더군요.”
고모가 불러주셨던 ‘찬송하는 소리 있어(19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445장)’를 품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교회에 있던 풍금은 매일매일 신세계를 경험케 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김 교수는 “바이엘 체르니도 몰랐지만 풍금 앞에 앉으면 음악적인 호기심이 샘솟아 조를 바꿔보고 찬송가를 편곡하게 됐다. 그야말로 영적인 신세계가 찬양을 통해 몸에 배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60년 전 연세대 교회음악과 입학과 함께 어린이 성가대 지휘를 맡은 건 어린이 찬송가 작곡에 물꼬를 트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악보 하나가 귀하던 시절, 여름성경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찬양을 지도하기 위해 ‘똑똑똑 문 좀 열어주세요’ ‘들려주세요’ ‘꼬마 목수’ 등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이 같은 활동은 장년 성가대 지휘와 함께 부활절 성탄절 등 주요 절기마다 찬양예배를 기획해 진행하는 사역으로 이어졌다. 군 제대 후엔 기독교학교인 경신고에서 ‘경신성가단’을 조직했고 모교인 대광고에선 남성합창단을 가르쳤다.
1988년 오른 오스트리아 비엔나 유학길은 김 교수의 음악 인생 2막을 준비케 한 전환점이 됐다. 김 교수는 “비엔나에 있는 동안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크고 작은 음악회를 다니며 교회음악의 지향점을 고민했다”며 “귀국 후 1년여의 준비 끝에 교회음악의 바른 방향성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교회음악아카데미를 창설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한국 교회음악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서울바하합창단을 창단하곤 매달 한 차례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 교회음악 연주회를 열었다. 공연장은 늘 교회였다. 교회가 가장 아름다운 연주회장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성도 몇 명이든 관객 수천 명이든 그에게 감격을 주는 건 찬사나 칭찬이 아니다.
“지휘를 마치고 나면 ‘최고예요. 멋있었어요’라면서 격려를 많이 해주시지요. 그런데 진짜 감격스러운 얘기를 듣고 나니 그만한 찬사가 없더군요. ‘장로님. 성가대 찬양 덕분에 매주 천국에 다녀오는 거 같아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는 22일 서울 영락교회(김운성 목사) 베다니홀에선 교회음악아카데미의 169번째 연주회이자 ‘김명엽 교수 교회음악 60년 기념음악회’(포스터)가 열린다. 그의 손을 거친 제자들 중엔 명성이 자자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열거할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이번 음악회의 무대에 오르는 이들은 김 교수가 직접 지휘봉을 잡는 서울바하합창단, 예찬중창단, 샤론어린이합창단(지휘 유은미) 등 그가 걸어온 60년 교회음악 여정의 손때 묻은 가족 같은 이들이다.
무대를 수놓는 곡들 또한 그의 음악 인생을 서사처럼 전할 작품으로 채워졌다. 음악회 첫 순서는 우리나라 합창 작품 악보가 거의 없던 시절, 김 교수가 우리 말로 처음 번역한 대표작 ‘대영광송(W.A. Mozart)’과 ‘신앙고백(S. Gounod)’이다. 그가 작곡한 어린이 찬송가 127곡 중 대표곡인 ‘똑똑똑 문 좀 열어주세요’와 ‘나의 한 가지 소원’이 뒤를 잇는다. 피날레가 될 마지막 무대는 성광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찬양한 첫 곡 ‘길 되신 주’와 남대문교회 성가대에서 은퇴하며 찬양한 마지막 곡 ‘주의 기도’로 채워진다.
인터뷰 내내 김 교수의 표정엔 생기가 돌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백발에 문득문득 그의 나이가 떠오르다가도 교회음악을 향한 애정어린 이야기를 들려줄 땐 푸른 빛 셔츠에 정갈하게 색깔을 맞추어 맨 넥타이처럼 청년 김명엽이 그려졌다. 김 교수는 교회음악 60년을 넘어 인생 3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교회음악을 전공해도 그들이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사역할 현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음악가가 아무리 실력과 철학이 있다해도 교회 공동체의 협력 없이는 바람직한 교회음악 사역은 불가능해요. 목회자와 교회음악가가 손을 맞잡고 예배를 연구하며 예배의 본질을 바르게 계승할 수 있도록 응원하려고 합니다. 또 저를 필요로 하는 시골의 작은 교회가 있다면 성가대를 지휘하고 섬기며 봉사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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