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밑지는 일 안한다" 적반하장…'대화 문턱' 높인 속내
“우리는 밑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17일 담화에서 한·미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핵화 요구에 대해 밝힌 입장이다. 체제 유지와 안전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인 핵을 폐기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유인책과 협상 조건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는 취지다. 2021년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해온 한·미에 북한은 역으로 ‘대화의 조건’을 설정하며 비핵화의 문턱을 높인 모양새다.
김 부부장은 특히 대화의 조건이 ‘비가역(非可逆·되돌릴 수 없는)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과 몇 년 전 스스로 내걸었던 대화 조건인 대북적대시정책·이중기준 철폐를 “가변적이고 가역적인 것 뿐”이라고 규정하면서다.
한·미연합훈련 중단에 대해선 “병력을 재투입하며 (훈련을) 재개하는데 20일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주한미군 철수도 “미군 무력이 다시 들어와 대한민국을 군사요충지로 만드는 데는 보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식이었다.
김 부부장이 이처럼 비가역성을 강조한 것은 최근 국제사회에서 재차 ‘비가역적인 비핵화’ 요구가 고조되는 데 대한 맞대응 차원으로 풀이된다. 지난 11~12일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선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인 핵 폐기) 요구가 공동성명에 담겼고,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소속 외교장관들은 17일(현지시간)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규탄하고 CVID를 강조한 의장성명을 공개했다. 결국 김 부부장의 요구는 핵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의 1인 독재 체제를 영구히 보장하는 선물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가깝다.
북한의 ‘비핵화 조건’ 변주법
북한은 그간 한·미의 대북정책이나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에 따라 나름의 협상 조건을 수시로 바꿔가며 공개해 왔다. 비핵화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 장치였다.
박근혜 정부였던 2016년 7월 북한은 이례적인 정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비핵화를 위한 5대 조건을 발표했다. ▶한국에 배치·전개된 미국 핵무기 공개 후 전량 철폐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인근 배치 금지 ▶대북 핵무기 불(不)사용 ▶주한미군 철수 등이었다.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 노 딜’로 결렬된 직후엔 당시 이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이 기자회견을 통해 대북 제재 일부 해제를 요구했다. 일부 제재가 해제된다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며 초기 비핵화 조치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미국이 ‘영변 핵시설 폐기+α(알파)’를 요구한 탓에 협상이 결렬됐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었다.
'논-스타터' 알면서도 왜?
하지만 그간 북한이 내놓은 대화의 조건은 애초에 충족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논-스타터(non-starter)’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북한이 오히려 요구 조건의 강도를 높여온 건 어떤 형태로든 비핵화 협상이 재개될 경우 몸값을 부풀리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풀이된다. 동시에 북한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마련해 놓곤 했다.
문재인 정부였던 2021년 9월 대북적대시정책과 이중기준이 철폐될 경우 종전선언에 호응하겠다는 김 부부장 명의 담화를 발표하면서 ‘개인적 견해’라는 단서를 단 게 대표적이다. 한·미가 북한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준 뒤에도 ‘북한의 유일한 의사 결정권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 생각은 다르다’는 식으로 나올 여지가 있는 셈이다.
김 부부장이 지난 17일 담화를 통해 요구한 ‘비가역성’의 구체적 내용은 분명치 않다. 다만 최근 북한을 향한 CVID 요구가 거세지는 상황을 감안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CVIG(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Guarantee·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인 체제 안전 보장)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
폼페이오 제안한 CVIG…尹 선 그었다
다만 윤석열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당시의 구상인 CVIG에 이미 명확히 선을 그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 당시 “북한의 체제 안전 보장이라는 건 우리 정부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북한에 여러 경제·외교적 지원을 한 결과 북한이 자연스럽게 변화한다면 그 변화를 환영한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김 부부장의 담화에 대해 외교부 역시 18일 입장 자료를 발표해 “지난 30년간 수차례 비핵화에 합의해 다양한 상응 조치를 제공했음에도 뒤에서 기만적으로 핵·미사일 능력을 지속 증강하고 합의를 파기해 온 북한의 행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북한은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대화 거부의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이는 유엔 안보리가 열 한차례 만장일치로 북한에 부과한 국제법상 의무로서 북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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