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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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우 기자]
글을 쓰려면 꼭 지식이 많아야 할까. 처음 글쓰기 모임을 꾸릴 때, 친한 몇몇 지인들에게 함께 하자는 말을 건넸다. 이름난 작가가 아니니 공개적으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워 택한 길이었다. 왕년에 일기 좀 썼다며 기다렸다는 듯 나서는 사람도 있었지만, 망설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내게 한 말은 이것이었다.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글은 지식이 많아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오랜 시간 그렇게 믿어왔다. 미디어에서 만나는 작가들은 하나같이 모두 박학다식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접할수록 작가라는 세계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졌다. 입만 열면 쏟아지는 온갖 지식들을 보면서 '나는 이번 생에 작가 되기는 글렀구나' 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도 쓰고 싶었다. 쓰고자 하는 욕구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아는 건 많지 않지만, 내가 살아온 삶은 나름의 글감으로 빼곡했다. 굴곡진 시간들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이었다. 이런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나의 이야기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지식은 책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라, 삶 그 자체로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은 그 무엇보다 경험으로 가장 많은 걸 배우니. 그렇게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을 믿고 글을 써나갔다.
▲ 누군가의 타자기 누구의 삶이라도 쓰일 가치가 있다. |
ⓒ unsplash |
지식이 많은 건 분명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된다. 더 넓고 깊은 글을 쓸 수 있을 테니까. 읽기가 익숙한 사람일 테니, 쓰기도 더 쉽게 접근할지도 모른다. 지식은 글쓰기에 물론 도움이 되지만, 모든 글에 풍부한 지식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인문사회과학 등 전문 분야의 글을 쓴다면 당연히 관련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에세이 같은 생활글의 경우 지식이 꼭 있어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살아온 삶이면 충분하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선입견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그걸 글에 잘 녹여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려운 업계 용어를 마구 사용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지루하게 지식만 나열해 읽는 독자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학벌과 글쓰기 능력이 비례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근육을 단련하듯 지속해야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글은 결국 독자와의 대화이기에 친절하게 독자를 배려하는 글일수록 읽기에 수월하다. 지식이 많다며 어려운 용어를 남발하고 우쭐대는 글을 쓴다면, 독자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지식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지식인들이 그래서 참 귀하다.
글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기사, 에세이, 소설, 시, 서평, 인터뷰, 사보나 잡지에 실리는 글, 블로그 글 등. 글의 스펙트럼은 의외로 정말 넓고 방대하다. 에세이만 해도 감성 에세이, 일상 에세이, 육아 에세이, 직종별 에세이 등 다채롭다. 기사의 경우도 단신, 르포, 인터뷰 등 같은 기사감이라도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 써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당신과 내가 다르듯, 쓰는 글의 내용도 종류도 다른 건 당연지사.
지금까지 내가 쓴 대부분의 글은 에세이다. 혼자 처음 끼적이기 시작할 때도 형식이 에세이였다. 에세이가 뭔지도 모르면서, 가장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꾸준히 썼다.
어쩌다 보니 수백 개의 에세이를 썼는데, 쓰다 보니 알게 된 건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는 점이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누구나 지금 당장 붓 가는 대로 쓸 수 있는 글이 수필(隨筆), 즉 에세이인 것(엄밀히 따지면 수필과 에세이의 차이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불필요해 설명을 생략한다).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사람에는 경계가 없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지역도 학벌도 상관없이 누구나 쓸 수 있다. 에세이는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적는 글이기 때문이다. 열 살짜리 아이도 칠순의 어른도, 처음 글을 쓰는 사람도 에세이는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최근 있었던 기억나는 일을 소재로 삼을 수도 있고, 오래전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 쓸 수도 있다. 때문에 첫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글은 에세이다.
같은 에세이라 해도 쓰는 사람에 따라 향기는 사뭇 다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진행한 글쓰기 모임은 모두 에세이 쓰기 모임이었다. 같은 글감으로 글을 써도 나오는 글은 천차만별이다. 글감은 사람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저마다 다른 색깔의 빛을 낸다. 이렇게 다양한 글이 탄생하는 건, 각자 살아온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건이어도 겪은 사람이,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 웃고 있는 노인의 얼굴 주름살이 늘어났다면, 그만큼 내 안에 쌓인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
ⓒ unsplash |
온라인에서도 글쓰기 모임을 몇 차례 진행한 적이 있는데, 이십 대부터 육십 대까지 정말 다양한 분들이 참여했다. 어르신들은 우스갯소리로 "내 인생을 글로 쓰면 책 몇 권은 나올 거야"라는 말을 하신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참여하는 멤버들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글감도 차고 넘쳤다. 살아온 인생이 길수록 그만큼 경험도 많았던 것.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매번 새롭게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변화가 워낙 빠른 세상이다 보니, 몇십 년 전의 이야기도 읽을 때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절을 복원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글이 탄생했다. '자유'라는 글감으로 함께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 거대 담론 같은 글감에 다들 쓰기를 힘겨워했다.
그때 한 멤버가 한국전쟁 때 월남한 아버지의 숨겨진 아픔을 글로 썼다. 그 글을 읽고 누군가에게 자유는 너무나 절실한 무엇이었음을,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갑남을녀의 이야기가 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한 시절의 풍경과 사람과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글들을 읽으면서, 누구의 삶이라도 쓰일 가치가 있다는 확신은 더 커져갔다. 개인의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한 세대의 이야기이고, 한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웬만한 소설 뺨치는 내용의 글들을 읽으면서, 멤버들의 글이 더 널리 읽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자신의 삶을 글로 옮기기를 소망했다.
어느 인생이라도 쓰일 가치가 있다. 서사가 없는 인생은 없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김제동의 톡투유'나 길을 가다 만난 사람과 대화하던 이전의 '유 퀴즈 온 더 블럭' 같은 TV프로그램이 가능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다. 뇌과학적으로도 인간은 다른 사람을 이야기로 기억한다고 한다. 저번에 술 마셨던 누구, 어디에 사는 누구, 무슨 일을 했던 누구. 그러니 어떤 인생이라도 쓸거리가 있는 것.
실제 가장 많이 출판되고 있는 책도 에세이다. 최근 몇 년간 에세이가 더 핫했던 이유는, 각종 직업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글을 썼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집 청소>, <저 청소일 하는데요?>, <셔터를 올리며> 등 많은 사랑을 받은 에세이에는,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직종에 직접 몸 담은 사람만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생생한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 건, 마이크를 쥐기 힘든 사람들의 진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꿀 필요가 없는 사람들보다 세상을 바꿀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글을 더 많이 써야 한다. 기득권이나 지식인만이 아니라, 버티고 견디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의 글을 적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쓰는 사람은 글을 쓰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독자들은 그 글을 읽으며 다른 이의 삶을 더 깊게 알아갈 수 있으니. 그렇게 밀도 있는 공감이 일어나게 하는 게 글이니. 깊은 공감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되니. 주저 말고 각자의 글을 썼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는 그냥 묻히기에 아까운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당신의 이야기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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